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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사랑 Jun 01. 2023

죽음의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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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분들이 비웃을 실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생태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일종에 강박을 가지고 있었던 저는, 무언가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어서 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숲과 나무를 공부해서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야심 찬 마음을 먹고 이 전공을 선택했죠. 대학에 들어와서도 좋은 의사는 수만 명의 목숨을 살리지만 내가 좋은 생태학자가 수천만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살리고 싶은 욕망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석사를 받고 박사를 받았죠.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생명을 살리는 나무와 숲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제가 정말 삶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지폴 소나무(lodgepole pine)는 높은 온도의 강한 산불이 난 후에 불에 검게 탄 숲을 빠르게 차지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달 후에 이 숲을 방문해 보면 정말 숲바닥을 빼곡히 메운 자그마한 아기 로지폴 소나무(seeding: 씨에서 발아된 아직 어린 나무)들이 50cm 이하의 간격으로 숲 바닥을 빼곡히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종자가 발아를 하더라도 햇빛을 받지 못하게 하여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하는 전략입니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해 봐도 헥타아르당 4만 그루가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아기 로지폴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나무라고 부르기도 힘든 연두색의 연한 몸통을 하늘하늘거리는 이 나무들이 빼곡히 검은색 숲바닥을 메우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사람의 몸이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을 만큼, 그리고 햇빛이 숲바닥에 닿지 못할 만큼 빼곡히 자라기 시작합니다. 마치 콩나무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자라던 이 소나무들이 점차 나무로써의 형상을 갖추어가고 서로의 손바닥이 마주칠 때쯤이 되면, 서로 양분과 햇빛과 수분을 경쟁하는 관계에 이르게 되지요. 그리고 그러한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나무들은 하나둘씩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 속에서 30-40년 정도가 흐르게 되면 겨우 200그루 정도의 소나무만 남게 되지요. 단지 1% 이하의 나무만 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불에 타서 이 과정을 반복하지요. 그럼 이 숲은 연구하는 저는 살아있는 1%의 나무를 연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죽은 99%의 나무를 공부하는 것일까요?


한 때 숲의 쇠퇴(decline)를 연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생태학적으로 숲의 쇠퇴는 나무들이 활력(vigor)을 지속적으로 잃어가는 상태를 말하는데요.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나무도 나이가 들어가면 활력을 잃고 주변 환경의 스트레스에 더 민감해지기 때문에, 같은 병해나 환경에 못 버티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이가 든 나무는 그 숲에서 더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기에 숲에 큰 영향을 주게 되고요. 하지만 이 정의는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활력이 떨어지는 것인데 언제부터를 어떤 정도를 쇠퇴로 볼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 후에는 점차 병에서, 혹은 상처에서 치유되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분은 30이 넘어가면서 느끼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50이 넘어가면서 체감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사람이 80을 산다고 했을 때, 사람은 30부터 쇠퇴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50부터 쇠퇴를 하는 것일까요? 이와 같이 나무도 나이가 들어가고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서부터가 쇠퇴로 봐야 하는지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나무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저는 매일 죽어가는 숲을 연구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나이 든 나무는 죽어가고 그 죽음을 통해서 어린 생명들이 살아가는 것일 텐데요? 그래서 산림생태학자는 자신의 연구가 어느 정도까지를 포함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연구의 폭이 자신이 구하는 답에 적합한 범위인지를 정당화시켜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저에게는 어려운 문제이고,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죽음이 지배하고 있는 숲을 공부하는 생태학자들은 이제야 나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무들이 어떻게 (태풍이나 산불 같은 외부 인자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죽어가는지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어떤 학자는 우리가 아는 지식대로라면 나무들은 영영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숲에서는 하나의 죽음이 수많은 생명체들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만 봐도 매일 수많은 동식물의 생명을 탐해서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생태학은 생명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서 스러져간 많은 생명들을 기억하기 위한, 제가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도와주는 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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