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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약' 말고, '감기약' 달라고 하세요.

말소리튜닝 46

by 신미이

잠깐 복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말은 표기와 소리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얼굴, 순환, 감기'와 같은 낱말은 표기대로 소리가 납니다. 연속되는 두 자음의 강도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얼굴: ㄹ<ㄱ

순환: ㄴ<ㅎ

감기: ㅁ<ㄱ


앞에 오는 자음의 강도가 뒤에 오는 자음의 강도보다 약합니다. 즉 앞 음절 받침의 자음 강도가 뒤 음절 초성의 자음 강도보다 클 수 없다는 '배열규칙'에 맞습니다. 그래서 표기대로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인류, 먹는, 법률'과 같은 낱말은 표기대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표기와 소리가 일치하지 않아요. 연속되는 두 자음의 강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인류: ㄴ>ㄹ

먹는: ㄱ>ㄴ

법률: ㅂ>ㄹ


앞에 오는 자음의 강도가 뒤에 오는 자음의 강도보다 큽니다. 우리말소리는 앞 음절 받침의 자음 강도가 뒤 음절 초성의 자음 강도보다 클 수가 없습니다. '배열규칙'에 어긋나는 겁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자음의 강도가 조정됩니다. 조정된 결과를 보세요. 이제야 '배열규칙'에 맞습니다. 그래서 조정된 대로 [일류],[멍는],[범뉼]로 소리가 나는 겁니다.


조정 전 조정 후

인류: ㄴ>ㄹ --> ㄹ=ㄹ [일류]

먹는: ㄱ>ㄴ --> ㅇ=ㄴ [멍는]

법률: ㅂ>ㄹ --> ㅁ=ㄴ [범뉼]


표기대로도 한번 소리 내 보세요. 쉽지 않지요? 입 속에서 혀를 굴리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혀를 굴리기 편하게 소리가 조정되는 겁니다. 모든 낱말을 표기대로 소리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우리말에는 표기와 소리가 다른 낱말이 많습니다.

여기까지는 복습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오늘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꼭 짚어봐야 하는 말소리 오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기 때문에 오류라는 것조차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연속되는 두 자음이 '배열규칙'에 맞으면 표기대로 소리 낸다는 건 이제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배열규칙'에 맞기 때문에 표기대로 소리를 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표기대로 소리를 내지 않는 말소리 오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음 문장을 소리 내서 읽어 보세요.


"한강 근처에서 한복을 입고 놀다가 감기에 걸렸어요"


여러분의 말소리를 다른 누군가가 듣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누군가에게 여러분의 말소리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1) [한강] 근처에서 [한복]을 입고 놀다가 [감기]에 걸렸어요.

2) [항강] 근처에서 [함복]을 입고 놀다가 [강기]에 걸렸어요.


1)은 표기와 말소리가 같게 들릴 테고 2)는 표기와 말소리가 다르게 들릴 테지요.

어떤 게 정확한 소리일까요?

배열규칙에 맞는지 따져 보겠습니다.


한강: ㄴ<ㄱ

한복: ㄴ<ㅂ

감기: ㅁ<ㄱ


앞 음절 받침의 자음 강도가 뒤 음절 초성의 자음 강도보다 클 수가 없다는 배열규칙에 맞는군요. 표기대로 소리가 납니다. 따라서 1)이 정확한 소리입니다.


1) [한강] 근처에서 [한복]을 입고 놀다가 [감기]에 걸렸어요.


이렇게 표기대로 소리를 내야 듣는 사람에게 또렷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2)처럼 소리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 [항강] 근처에서 [함복]을 입고 놀다가 [강기]에 걸렸어요.


표기대로 소리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소리를 바꿨습니다. 맥락상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는 합니다만, 말소리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럼 1)처럼 표기대로 소리 내지 않고, 2)처럼 소리를 바꿔서 내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입술과 혀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좀 더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조음 위치를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1)과 2)에서 연속되는 두 자음의 조음 위치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1) 2)

[한강]: ㄴ-ㄱ(치조-연구개) --> [항강]:ㅇ-ㅇ(연구개-연구개)

[한복]: ㄴ-ㅂ(치조-양순) --> [함복]:ㅁ-ㅂ( 양순-양순)

[감기]: ㅁ-ㄱ(양순-연구개) --> [강기]:ㅇ-ㄱ(연구개-연구개)


1)은 연속되는 두 자음의 조음 위치가 다릅니다. 반면, 2)는 연속되는 두 자음의 조음 위치가 같습니다.


정확한 소리를 내려면 1)처럼 조음 위치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2)는 조음 위치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말을 할 때 입운동이 활발하지 않은 거죠.


2)처럼 소리 내는 사람들은 아래 문장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나타납니다.


"한국관광공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항국광광]

"건물 전광판긴급하게 보수하느라 주변이 혼잡합니다. "

[검물 정광판] [깅급]

"장애인 노동착취 문제는 민간단체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밍간] [싱고]

"안경을 꼈는데도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하게 보여서 안과를 다녀왔어요."

[앙경] [앙개] [앙과]



밑줄친 낱말은 표기대로 소리를 내야 맞습니다. 표기대로 소리를 내려면 조음위치가 달라져야 하지요. 그런데 조음위치를 바꾸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부정확한 말소리가 산출됩니다. 게다가 조음 위치가 잘못됐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걸 다 신경써야 하냐고요?

네.

또렷한 말소리와 뭉개지는 말소리는 정말 한 끗 차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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