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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그리고 노란 튤립

by 석현준

눈이 내렸다

새해 첫눈이었고 모두들 하늘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는 눈 속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오는 것 같은 나날들이었다.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르면 또 다른 하루가 아닌 어제와 같은 하루 같았다. 아무 감흥도 색깔도 없이 살아가는 무채색의 일상이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서 당연하게 색을 잃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파스텔톤의 어릴 때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오늘은 하늘마저 구름이 끼고 잿빛으로 흐려졌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이 펑펑 내렸지만 다들 아무런 감흥도 웃음도 없이 로봇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퇴근 시간이 끝난 후 남은 일을 더하고 저녁시간이 조금 지나갔을 때 난 새해 첫눈을 맞아볼 수 있었다. 옷에 닿으면 바로 사르르 녹아버리는 작은 눈 결정체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러다 가로등 아래에서 어린아이처럼 눈사람을 만드는 널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너는 아직 자기 자신 그러니 너만의 색이 있어서. 그리고 그 색이 점점 너에게 번져가고 있어서 너를 보고 서있었다. 너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


"저기 혹시 눈사람 만들고 싶어서 그래요?"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꿈속에서 노는 것처럼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눈덩이를 굴리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것이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첫눈 속에서의 첫 만남이라 로맨스 영화에서 나올만한 아주 신기하고 낭만적인 만남이었다. 그리고 너와 함께한 행복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놀이동산도 다니며 시간이 흘렀다. 언제나 행복할 것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네게서 이런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혹독하게 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작년에 우리가 만난 날이었다. 딱 그때까지만 이라도 널 볼 수 있으면 이라는 작은 욕심이 생겼다. 그런 욕심 때문에 널 힘들게 했다. 그렇게 네가 떠났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끝없는 동굴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커다란 욕심 때문에 너와 가장 행복했던 그날이 너의 기일이 되어버렸다. 병원에서 그리고 네가 울면서 했던 말들이 내 머릿속을 휘어 감았다. 처음도 나만의 색을 가지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너에게 접근한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저 너를 위하는 척하고 나를 위한 것 같아서 네게 너무 미안했지만 그러면서도 네가 미웠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함께 있을 수 있었다면, 네가 아프지 않았다면,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네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리고 내게 생각난 그때였다.

우리가 몇 번 만난 후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날 넌 내게 노란 튤립 다발을 건네주었다.

우리 둘은 그 꽃의 의미도 모른 체 중요한 날마다 서로에게 그 노란 꽃을 건네었지.

아마 넌 알았을까?

그 꽃의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가짜 사랑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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