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마 청춘은 초록

by 석현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

무뎌지고 틀에 박혀버린 어른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

여름의 하늘처럼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 말이다

그 웃음을 색으로 나타내면 밝음의 극치에 달하는 쨍한 초록색

없을 수도 있는 여름의 초록 말이다


장마가 이틀째 내리는 날이었다. 비 안엔 수많은 웅덩이들이 자리를 잡았고 나는 그 웅덩이들을 피해서 우산을 쓰고 편의점에서 나와 작은 푸른빛의 음료를 마시며 걸어가고 있다. 귀에선 날씨에 맞는 슬픈 노랫말이 흘러나오고 나는 빗속에서 낭만에 취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편의점에서부터 누군가 내 어깨를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난 그저 우산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라고 생각하며 걸어왔다. 그리고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에 다시 한번 더 누군가 어깨를 툭툭 치자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엔 네가 서있었다. 너는 작게 나를 보며 웃고 있었고 나는 황급히 귀에서 이어폰을 뺐고 얼굴은 점점 화끈거렸다. 그리고 어색한 인사를 한 뒤 우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공원에 있는 작은 처마가 있는 벤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공원을 바라보며 나는 비가 내리는 소리와 비의 내음을 맡으며 여름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마 내게는 아직 여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이 없었다. 너는 비가 만들어낸 웅덩이들을 보며 내게 말했다.

"청춘 영화 같은데 보면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여름날이 가장 많이 나오더라"

나는 내가 본 영화들을 떠올렸고 몇 안 되는 청춘 영화를 생각하며 말했다.

"음.... 청량하잖아 바람도 기온도 모두 습도도 모두 익사해 버릴 것만 같은 여름에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려 주니까. 어쩌면 마음속에 있는 근심이나 작은 의심조차도"

내가 말을 마치자 너는 나를 보며 갑자기 크게 웃었다. 따갑게 귓가를 때리던 빗소리마저 아득하게 들릴 정도로 밝고 청량한 네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같이 웃었다. 아무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조차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웃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아주 어릴 때 웃었던 그 기분 그대로였다. 근심도 걱정도 사라질 그런 웃음이었다. 서로의 웃음이 사그라들 때쯤 너는 말했지.

"하루에 한 번은 이렇게 크게 웃는 게 좋대"

연신 내 귓가에 맴도는 말이었다.


아직도 비가 온다. 널 만나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작은 진동소리에 휴대폰을 보니 SNS에 내 게시글에 답글이 올라와 있었다. 여름을 찾고 있다는 글에 너는 자신도 여름을 찾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아마 우린 그 공원 벤치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겠다.


너는 초록이었다.

아주 쨍한 채도를 가진 초록빛 여름.

아직도 아득하게 울려 퍼지는듯한 네 밝고 청량한 웃음소리처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