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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은 화난 감정을 쏟아내고 싶어 한다

감정환기(Ventilation), 핵심원칙, 원칙적용팁

by 서기

대학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많이 아픈 사람들이다. 몸이 아프면 예민해지고 만사가 귀찮은 법이다. 대학병원은 진료절차도 복잡하고 공간도 넓어서 처음 병원에 오게 되면 혼란스럽다. 대학병원은 오천명 이상의 교직원들의 직장이다. 환자에겐 평생에 한 번 겪게 되는 일이지만, 의료진에겐 일상적인 일을 하는 곳이다. 이러한 괴리가 환자에게 아픔을 주기도 한다. 대학병원은 하루에 약 일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다. 많은 직원과 많은 환자들이 치료하는 장소이다 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긴다. 의료진의 불친절한 응대태도, 복잡한 진료절차, 고액의 진료비 등 여러 가지가 환자들을 화나게 만든다.


환자들이 화난 감정을 하소연할 곳은 마땅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고객상담실은 병원에서 대놓고 화난 감정을 하소연하라고 마련해 놓은 곳이다. 그러니 고객상담실 직원들의 일도 쉽지는 않다. 물론 심각한 내용의 민원도 있지만 대부분은 화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오는 경우이다. 매일매일 이런 화난 환자들의 감정을 처리해야 하니 어렵다. 다른 의료진이 잘못한 일까지 고객상담실 직원이 대신 욕을 먹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객상담실 직원에게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쉽지는 않지만) 환자가 화난 감정을 쏟아낼 때 그 감정을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 충분히 화난 감정을 쏟아내도록 말이다. 그렇게 하면 화난 감정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고 그 이후에는 조금 더 편안한 감정이 들어온다.


소아백혈병 환자를 담당하는 의료사회복지사시절이 있었다. 소아백혈병 환자를 담당하면 주로 상담하는 대상은 소아백혈병 환자가 아니라 그 부모이다. 정확하게는 어머니이다. 이 시절에 나의 별명은 "여자 울리는 남자"였다. 어머니들과 상담하면 대부분은 우신다. '제가 양육을 잘못해서 우리 애가 백혈병에 걸린 건가 싶어서 너무 후회가 돼요' 대개가 이런 내용의 죄책감을 가지고 계신다. 이럴 때 나는 장황하게 '백혈병의 원인은 그런 요인이 아니고 다양하며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냥 들어드린다. 말하는 내용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에 공감하면서 듣는다. 그러면 더 우신다. 나는 계속 듣는다. 상담실에 있는 휴지를 정성스럽게 접어서 드리면서.


고객상담실에서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쏟아내고 싶은 감정이 슬픔이 아니라 화 일 것이다. 처음엔 화가 나서 왔지만 충분히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사실 별일 아니었네요'라며 돌아가는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들어줘서 고마워요.'라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들은 시시비비를 따지기보다는 화난 감정을 쏟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상담에서는 이걸 감정환기(Ventilation)라고 한다. 답답한 방에 갇혀 있으면 숨이 막히듯이, 감정도 적절하게 환기가 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된다. 그냥 두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환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현장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이러한 나쁜 감정을 잘 쏟아내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내담자는 속이 후련해지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소아백혈병을 가진 어머니들은 병실에서 환아를 돌보면서 슬픈 감정이 들지만 그걸 환아에게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런 감정들이 쌓여서 신체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훌륭한 상담자는 감정환기(Ventilation)를 잘 활용한다. 환기를 잘하지 못하는 내담자의 나쁜 감정들을 잘 환기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고객상담실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좋은가. 환기할 자세가 완벽하게 되어있는 내담자들만 오니 말이다. 그러니 그냥 공감하면서 들어주기만 해도 훌륭한 상담자가 되는 것이다.


고객상담실은 고객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환자들은 화난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 한다. 상담자는 환자의 화난 감정을 존중하고 그것을 환기시켜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감정을 환기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화난 감정도 적절히 환기되면 치유의 시작이 된다. 어쩌면 그 자체로 훌륭한 치료이다. 환기는 치료다. 이것이야말로 고객상담실의 진짜 역할이며, 고객상담실 직원이 훌륭한 치료자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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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원칙


1. 화난 고객은 문제 해결보다 화난 감정 해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화난 민원인은 시시비비를 따지기보다 먼저 화난 감정을 쏟아내고 싶은 것이다.

2. 화난 감정은 환기되어야 한다.

- 답답한 방에 갇혀 있으면 숨이 막히듯이, 감정도 적절히 환기되지 않으면 건강에 해롭다.

3. 화난 감정을 충분히 쏟아내도록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 감정을 환기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4. 감정 환기 자체가 훌륭한 치료이다.

- 단순히 불만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치료자라고 생각하자.



원칙 적용 팁


1.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감정에 공감하라.

- 환자를 화나게 한 가해자나 가해사실에 공감하지 말고, 화나거나 슬픈 감정 자체를 인정하라.

2. 충분히 쏟아낼 때까지 기다려라.

- 성급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감정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때까지 들어주라.

3. 화난 환자는 이미 환기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라.

- "왜 나한테 그래요", '내가 왜 이런 화난 사람들의 화를 받아주는 일을 하는 가' 라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자.

- 억지로 감정을 끌어낼 필요 없이, 공감하며 들어주기만 해도 훌륭한 상담자가 될 수 있다.

4. 환기 후에는 대부분 스스로 정리한다.

- 환자 스스로 정리하지 않더라도,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신뢰(rapport)형성은 해두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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