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최고의 선택! 대학 추천! 강추!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자녀 공부 이야기가 나왔다.
자녀가 공부를 못할까 봐 걱정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을 건넸다.
"뭐, 그냥 배 태우면 되지~"
나는 해대(한국해양대 해사대학) 출신으로 해대 출신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데, 정말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거나 하고 싶은 게 확실하다면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해대 보내서 배 태우는 게 최고라고.
이쪽 세계 밖에 몰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다들 흙수저 출신이라 부모 도움 없이 그나마 이만큼 살 수 있는 건 다 대학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엔 SKY 갈 거 아니면 해대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로.
실제로도 부모-자식에 걸쳐 해대에 다니는 경우는 흔하고, 할아버지까지 포함해 3대에 걸쳐 해대에 다니는 경우도 많다.
형제가 다니는 경우도 많다.
나도 남매로 나란히 다녔으니 말이다.
해대 출신이 아닌 뱃사람들이 자녀를 해대에 보내는 경우도 많다.
그 정도로 해운업계에서 해대 사랑이 엄청나다.
그래서 친구에게 자녀 미래 진로로 배 태우라고 한 말도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할수록 뭔가 느낌이 이상해졌다.
"우리 아들은 배 못 타~ 멀미가 심해~"
- 상선은 멀미 안 해~ 지인짜~ 드물게 멀미하는 사람 있긴 한데 그 사람들은 군대 갔다가 바로 공무원으로 빠지거나 중공업이나 해운회사 취직해~
"우리 아들은 몸이 너무 약해~"
- 에이~ 여자도 다 배 타는 데 무슨~ 항해사로 타면 힘쓰는 거 잘 안 해~
"우리 아들은 여자애보다도 좀 더 숫기도 없고 좀 그래서 안 돼~"
-......
눈치 없이 배 타는 거 별 거 아니라고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려고 대답하다가 상대가 원하는 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걸 깨닫고 기분이 상했다.
배 타는 게 무슨 큰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실드를 치는 건지 짜증도 났다.
원양어선 타는 거 아니라는 건 내 친구니 이미 아는데......
원양어선이면 나도 권유 안 하지.
그렇게 위험한 일 아니니까 권유하는 거 아닌가.
내가 탔으니까.
내가 혜택을 봤으니까.
우리 친오빠도 탔으니까.
그걸로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으니까.
친구가 자녀 진로 중 쉬운 길 찾길래.
여기 쉬운 길 있다고 알려준 것뿐인데, 왜? 도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솔직히 아들 군대 안 보낼 건가?
군대 안 가냐고.
군대 월급 오르고, 18개월로 단축됐다고 해도.
월급 제대로 받고 승선 사회 경력 인정받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솔직히 아무리 배 타는 게 험하다 해도 군대의 불합리함보단 나을 것 같은데...
물론 모든 건 아들. 그 자신의 선택이긴 하다.
아들 본인이 싫다고 하면 솔직히 방법이 있나. 없지.
어떤 학부모는 자기 아들 좀 설득해 달라고 학부 조교한테 전화하는데...
학교에서 임시로 근무할 때 그런 전화 몇 번 받아봤다.
제복 입으면 여자들한테 인기 많지 않냐고.
그런 말 좀 잘해줘서 아들 좀 입학시켜 달라고 사정사정하셨었다.
그래서 1시간 넘게 통화하면서 꼬셨다.
돈 벌면서 해외여행할 수 있다는 둥, 군대 가는 것보다 학교 생활이 훨씬 낫고 별로 안 힘들다는 둥, 다른 대학생이랑 똑같이 방학 다 즐길 수 있다고 나름 눈높이에 맞춰서 열심히.
배 탄다는 게 인식이 너무 안 좋다는 게 씁쓸하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대를 권유했을 때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자기 귀한 자식한테 어떻게 배 타라는 소리를 할 수 있냐고 상대방은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사실 육지에 땅 밟고 가족들과 같이 사는 게 더 좋은 건 맞다.
분명 승선은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평생 승선을 하는 사람은 소수고 대부분은 3~5년 사이에 승선을 마친다.
그리고 그 경력을 가지고 육상에 자리를 잡는다.
확 낮아진 월급과 직급에 치이면서 저마다의 이유로 버틴다.
그러면서도 다들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데 그건 아마 든든한 보험이 있어서 그럴 거다.
실제로 다시 배를 탈 마음은 1도 없지만, "괜찮다. 내가 배 타러 가면 된다."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우울해하는 친구한테도, "괜찮다. 다시 배 타러 가면 되지."하고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줄 아냐!"라고 자신감 있게 소리칠 수 있는 게 직장인에게 얼마나 소중한가.
살면 살수록 이만큼 쉽고 든든한 길이 잘 없다는 걸 깨닫고 또 깨닫는다.
그러니 자기 자식에게도 권하는 거 아닐까?
배에 대한 사람들 인식이 바뀌지 않는 게 우리한테는 더 좋을 거다.
인기가 많아지면 경쟁만 치열 해질 테니까 말이다.
예전에 어느 카페에 '도선사 되는 법'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흙수저라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공부 좀만 하면 길이 있다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나아갔으면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학교 선배라는 사람에게 메일이 왔다.
저 글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많이 알려져 봤자 우리에게 좋을 게 없다나.
그래서 결국 내렸다.
별로 인기 있는 카페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하하하
어쨌든 배 타는 것도 수많은 직업 중에 하나다.
별 거 아니다.
너무 편견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
막상 해보면 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