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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Aug 14. 2024

손가락은, 없다

수요일의 시


손가락은없다


박성현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데 

의자 깊숙이 몸을 구겨넣은 애인이  

의자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가 사라진 한 점의 바늘구멍에서 

분명하게 흘러나오는 회색과 암흑을 보면서 

두 눈을 잃어버린다      


두 눈 없이 살다가 벌레를 밟으면 

벌레의 불행이지, 라며 

누군가 내게 철학적 관점과 태도를 알려 준다    

 

그러나 나는, 

두 눈이 없는데도 습관을 버리지 못해 

안경을 쓰다가 귀를 잃어버린다   

   

도무지 얼굴에 걸리지 않는 

두꺼운 안경, 

목소리를 점자로 바꿔야 하는 불편함이 

몹시 거슬리겠지만 

     

아무렴 어때 

벌레의 불행은 벌레의 것 

기침을 하다가 

입이 얼굴 밖으로 튀어나갈 때도   

   

나는, 

눈 내리는 해변에 방치된다 

아무렴 어때, 

얼굴에서 눈이 사라지고 

귀를 잃어버리며 입까지 삭제됐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을 하는 건 손가락 

애인의 섬세한 진동을 느끼는 것도 

우울과 불안에 기대는 것도 

일인용 식탁에 앉은     

 

나는, 

손가락에 집중된 쾌감을 만끽하며 

분주하게 점심을 먹는다          









계간 <시작>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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