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시
박성현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데
의자 깊숙이 몸을 구겨넣은 애인이
의자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가 사라진 한 점의 바늘구멍에서
분명하게 흘러나오는 회색과 암흑을 보면서
두 눈을 잃어버린다
두 눈 없이 살다가 벌레를 밟으면
벌레의 불행이지, 라며
누군가 내게 철학적 관점과 태도를 알려 준다
그러나 나는,
두 눈이 없는데도 습관을 버리지 못해
안경을 쓰다가 귀를 잃어버린다
도무지 얼굴에 걸리지 않는
두꺼운 안경,
목소리를 점자로 바꿔야 하는 불편함이
몹시 거슬리겠지만
아무렴 어때
벌레의 불행은 벌레의 것
기침을 하다가
입이 얼굴 밖으로 튀어나갈 때도
나는,
눈 내리는 해변에 방치된다
아무렴 어때,
얼굴에서 눈이 사라지고
귀를 잃어버리며 입까지 삭제됐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을 하는 건 손가락
애인의 섬세한 진동을 느끼는 것도
우울과 불안에 기대는 것도
일인용 식탁에 앉은
나는,
손가락에 집중된 쾌감을 만끽하며
분주하게 점심을 먹는다
계간 <시작> 202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