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세종대왕. 그래서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 그분 때문에 힘들고 버거웠다. 국어 수업 때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어제훈민정음' 속 중세국어 문법을 알려주는 강사님의 설명을 따라가느라 진땀을 뺐다. 한국사 시간에는 노트 한 면을 가득 채운 그의 업적을 암기하느라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세종대왕이 나라의 기틀을 잘 다져주셔서 우리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겁니다. 그만 구시렁대고 다 외워서 문제 하나라도 더 맞으세요.”
한국사 강사님의 예리한 지적에 불만이 쑥 들어갔다. 업적이 넘쳐 암기할 내용이 많다는 것은 그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한 반증일 터. 과학, 예술, 문화를 고루 발전시키며 조선의 황금기를 이루었기에 후손들에게 ‘대왕’으로 불리는 그분, 세종대왕. 임금 노릇 제대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종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 단연 으뜸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가 아닐까.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위한 그의 노력은 우리 고유 문자를 탄생시켰다.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고 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백성들을 위해 오랜 시간 집현전 학자들과 연구한 끝에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28자를 1443년에 만들고, 1446년에 반포한다.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훈민정음해례본』도 이때 편찬되었다. 이 중에서 어제(御製)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만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한 것이 ‘훈민정음언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완전한 책의 형태를 갖춘 단행본이지만, ‘언해본’이라고 통칭되는 '훈민정음언해'는 세조 5년(1459)에 발행한 『월인석보』 1권 책머리에 실려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피, 땀, 눈물이 담긴 책들을 보고 싶어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다녀왔다.세계문자박물관은 문자에 특화된 전문 박물관으로, 2023년 6월 인천 송도에 문을 열었다. 기존 공원과 어우러질 수 있는 수평적이고 유려한 곡선 형태의 열린 공간으로 디자인되어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축형태는 카메라의 셔터 버튼을 계속 누르게 만든다.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을 주제로 한 상설전시실.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암각화에서 시작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명된 인류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 이집트 문명의 중심에 있던 성각문자, 바다를 따라 세계로 퍼진 로마인들의 라틴문자, 사막을 건너 초원으로 간 아람문자,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한 한자를 지나 ‘한글’ 코너에 이르면 『훈민정음해례본』, 『월인석보』, 『용비어천가』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책들을 만날 수 있다. 비록 진품이 아닐지라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특히 '세종어제훈민정음' 서문은 세종대왕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감격스럽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세종어제훈민정음' 서문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자주정신,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애민정신, 새 글자를 만드는 창조 정신,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하는 실용정신. 세종은 이 모든 것을 새 문자에 담는다. 훈민정음 창제 취지를 이토록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할 수 있다니,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다른 나라에도 자기 언어를 위해서 새 글자를 만들어낸 적은 많이 있지만, 훈민정음과 같이 문자를 만든 목적과 원리를 책에 기록한 예는 없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훈민정음해례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사용한 문자는 사백여 종, 하지만 현재까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는 삼십여 종에 불과하다는 팸플릿의 설명을 읽으니 한글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유구한 문자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지만, 생명력을 잃지 않은 한글! 겨레의 눈을 밝힌 글자이며, 우리 문화를 꽃피운 밑거름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경
(좌)훈민정음 해례본, (우)월인석보
*커버사진 출처-<세종 대왕, 한글로 겨레의 눈을 밝히다>, 마술연필/이수아, 보물창고,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