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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 Feb 29. 2024

120% 인간의 고백

사람을 낙원으로 삼으면 벌어지는 일

이 글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고백이자 나에 대한 반성문이다.


*

   

   순수하고 맑은 그의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걸 목격하자마자 그녀의 마음은 말 그대로 북북 찢겨나갔다. 그녀는 이 눈물이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단숨에 알아챘다. 평화롭고 무탈한 그의 일상에서는 쉬이 벌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지를 뽑아 그의 손에 쥐어주고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두 사람 앞에 놓인 두 잔의 맥주는 이미 비워진 지 오래다.

   그는 그녀에게 미안한 점이 많다고 운을 떼며 자신의 눈물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가 주는 사랑이 너무나 거대해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받은 사랑만큼 제대로 베풀어주지 못하는 자신의 못난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다고 했다. 아마도 자신은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 찬 사람이라서 아직 연애에 있어 준비된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러니까 넌 나에게 100%도 아닌 120%를 해주는 사람인 거야, 상대적으로 난 그렇지 못한 거고.”

   그의 주장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정말 맞는 말이었으므로.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그가 처한 상황 때문에 남들 다하는 평범한 데이트도 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회사의 미래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중대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그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일에만 온전히 매달려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집에서는 어떠할까. 몇 년 전 크게 쓰러지신 뒤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아버지를 돌보느라 두 손발이 모자랐다. 그의 여동생과 함께 돌아가며 케어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게 돌봄의 현실이다. 주말이면 쉴 수 있는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사뭇 다른 삶의 사이클이 그의 목둘레를 점진적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분명 그녀의 존재는 팍팍한 그의 삶에 한 줌의 숨구멍이었다. 그녀도 그의 상황을 빼곡히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그가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120%의 인간이다. 그녀에겐 일과 사랑은 별개의 문제였다.

   간혹 연인끼리 다툼의 씨앗이 되는 질문이 오간다. ‘일이야? 나야?’ 또는 ‘친구야? 나야?’처럼 A 또는 B 둘 중 한 가지 선택을 요구하는 이것은 어떤 관계에서는 중요하게 작동한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유치한 질문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질문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명제와도 같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일과 사랑은 병렬적인 관계라고 믿어왔다. 일은 일이고 사랑은 사랑이야. 왜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해? 난 둘 다 취할 수 있어 —라는 강한 믿음이 그녀의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온 그녀에겐 그가 내뱉는 말이 처음부터 와닿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이와 별개로 진심을 다해 이해하기엔 일정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고 이윽고 조용했었던 맥주펍의 높은 테이블은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에 비하면 자유로웠다. 혼자 살고 있었고 부모님도 건강하셨기에 당장 그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는 그녀는 업무가 들어오고 나가는 시기가 달랐으며 현재 그녀의 업에 있어 비수기에 가까웠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그녀는 시간 날 때마다 그에게 사랑의 찬가를 보냈다. 말 그대로 가사를 개사해서 노래 부른 걸 녹음하여 그에게 보내준 적도 있었다. 또한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도 서프라이즈로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물론 그는 그녀의 깜짝 방문을 즐겼고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준 그녀에게 매번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의 손에 부담을 쥐여줬다. 데이트하기 이렇게 어려운 일이냐며 대놓고 따지는 대신 그에게 더 무한한 사랑을 쏟아부으며 은근한 압박을 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날 봐. 난 널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할 수 있고 내 몸과 마음을 다해 바칠 수 있는 사람이야. 어때? 나의 사랑 대단하지 않아? 그를 위한 거라며 했던 사랑의 행위는 결코 순수하지 못했었다. 이건 보여주기식의 사랑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다 손을 얹으며 수면 위로 떠오른 몇 가지 언행을 머릿속에서 건져보았다. 너 정말로 이 사랑이 순수했다고 생각하니? 그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행동이었던 거 아냐?


   빨갛게 충혈된 그의 갈색 눈을 빤히 바라보다 그 속에 비친 그녀 자신의 얍삽한 모습을 마주했다. 사랑이라고 했던 행동이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뼈가 시리도록 다가온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이 모든 걸 이긴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잊지 말아야 할 태도는 중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랑’이라고 말할 때 느껴지는 혀의 달콤한 굴림이 마냥 아름답고 탐스럽게 느껴지지만 어떤 경우에서는 해가 될 수 있는 독사과 같은 면모가 나타나기도 하니까.

   그녀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서 가끔 그런 점이 엇나갈 때가 있다고 그에게 사과를 건네었다. 그리고 넌 절대 못난 사람이 아닌 소중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함께 방법을 찾아 나가보자. 나 이런 일로 너랑 틀어지고 싶지 않아.”

   “나도 너랑 계속 함께하고 싶어.”

   “처음 너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 중 하나는 네 안이 너 자신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야. 상대적으로 난 그러지 못한 편이니까…. 나 좀 더 내 자신에 집중해 볼게.”

   이건 사랑을 줄이겠다는 표현이 아닌 단지 한쪽으로 기울어진 평형추를 원상복구 시키는 자연법칙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널 나의 낙원이 아닌 개별적 인간으로 바라볼게.”

   “개별적 인간이라니 참 너답다 너다워.”

   다소 로봇같이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말에 그는 피식 웃음이 터져버렸다.


   오고 가는 눈물과 대화 속에 그들은 서로의 손을 끈끈이처럼 꼭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놓칠세라 두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문득 그녀는 생각한다. 널 나의 독보적인 낙원으로 여기지 않고 나와 너의 낙원을 각각 잘 구축하여 때가 되었을 때 하나의 온전한 낙원으로 합쳐보면 어떨까 — 하는 그런 유토피아적인 소망을. 그런 완전체에 가까운 낙원을 함께 꾸려나가는 것이 비로소 사랑의 목표이자 더 나아가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믿음이 새롭게 싹 틔우고 있었다.

   가게에 나오면서부터 헤어지기 전까지 내내 그녀는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고 이 추운 겨울에 히트텍도 필요 없겠다며 그를 짓궂게 놀려댔다.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오른손을 본인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 세계는 그와 그녀 단둘뿐이었고 다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마치 새로운 싹이 단단히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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