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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 Mar 14. 2024

도둑의 해명

생활기록부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건너편 무수히 쏟아지는 빛을 오롯이 받고 있는 한 초등학교를 멍하니 바라본다.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알록달록 칠해진 입구에서 아이들이 부모님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몇몇은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산딸기처럼 조막만 하다. 무슨 날이기라도 한 걸까. 나는 핸드폰 화면의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야 3월의 첫 번째 월요일이 입학과 개학이 열리는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소 느끼한 환영 문구가 초등학교의 전광판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날이 따뜻해서 봄이 오는 줄 알았더니 네가 온 거였구나, 거 참 좋은 말이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보다가 이제는 아이들이기보다 그들의 부모님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버린 듯하여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저 아이들은 얼마나 찬란하고 무궁무진한 세계가 펼쳐질지 알고 있을까. 아마 그보다는 새로운 반 친구들을 만나 저절로 신이 날 것이고, 유치원과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여 심란해할 수도 있을 테다. 나는 어떤 아이였나. 서른 명이 간신히 넘는 교실 뒤편에서 화려한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엄마가 날 보고 있는지 자꾸 뒤돌아보는 아이. 주목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얌전히 앉아 있는 소심하고 시시한 아이. 그랬던 것 같다.


  작년부터 정부 포털 사이트에서 생활기록부를 조회할 수 있는 사실을 친구가 보내준 링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름과 정보를 입력하고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생활기록부를 찾아보았다. 눈에 띄는 건 없었고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 매사 성의 있게 처리하며 행동이 바름

 무난했다는 점이 오히려 눈에 띈다. 새로고침을 해본다. 여전히 짧고 단단한 문장이 내 시야를 점령했다. 기억을 되살려보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흐렸다. 친구는 ‘교우관계가 좋지 못하며 매사 학업 집중도가 떨어짐’이라고 적힌 것보다 나으니 되려 위안삼을 수 있지 않냐며 가벼운 위로를 해주었다.


   김동우.

   문득 스쳐 지나가는 이름 하나. 내 첫 짝꿍. 그 애는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손을 들며 질문했고 반 친구들은 자지러지듯이 웃곤 했다. 김동우는 교무실에 자주 불려 다녔다. 한 달쯤 지나고 김동우는 전학을 갔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는 담임의 말을 난 믿지 않았다. 내 옆자리는 한동안 고요했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애의 이름이 기억난다. 짓궂은 표정만 떠오르고 그 애의 이목구비는 먹구름 낀 듯 흐렸다. 아마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아 있을까? 사람들이, 친구들이, 내가 널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담임까지 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맞아, 그런데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언뜻 이런 걸 ‘도둑놈 심보’라고 부르던데. 그렇다면 난 도둑년인 걸까.

   딱 거기 까지야. 거기까지만 하면 돼.

   어린애의 티가 벗어나자마자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바코드 찍는 일, 재고 정리, 판매와 같은 일을 전전했다. 들어온 물건의 개수를 확인하고, 송장지에 적혀있는 숫자와 맞는지 확인한다. 박스를 나르고 정리해 여러 겹으로 포개어 밖에 내놓는 일. 신년이 되면 사주를 보러 갔는데, 점쟁이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너는 안전한 걸 좋아한다고. 공무원 같은 거 하면 참 어울리겠다고. 그런데 네가 발전하길 원한다면 그걸 깨부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며 자뭇 자기 계발서에 나올법한 말들을 들려주었다. 사주는 통계학이기도 하니 나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인간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식은 커피를 들이키며 일기장을 펼쳤다. 노란색 형광펜으로 ‘밖으로 나가야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 위에 칠을 하기 시작했다. 노란색 잉크는 두 번째 줄에서 끊겨버렸다. 옆 페이지로 옮겨가 끝이 뭉뚱한 연필로 1학년 때의 생활 기록부를 다시 작성해 본다.

   -항상 웃는 얼굴로 매사 즐겁게 생활하며 급우들 사이에 인기가 많음. 학습 태도가 좋고 성적이 우수하며 가창과 피아노에 재능이 있음.


   다 마신 커피 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건너편 초등학교 옆 문방구로 향했다. 갓 입학한 새끼 병아리들 틈 사이에 나는 노란색 형광펜을 신중하게 골랐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문방구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고르다가 세월 다 가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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