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엄마가 죽은 후, 민정은 처음 일기장을 폈다. 날짜는 한참이나 밀려있었고 일기장의 모서리는 손 떼가 묻어 닳고 닳아있었다.
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너무 날 좁게 가두었다.
내가 왜 나를 가두나…….
그러게 말야. 그럴 필요 없는데. 민정의 손끝에서 검정 볼펜이 빠른 템포로 춤을 춘다. 막 떠오른 악상을 붙잡아두려는 작곡가처럼 놓칠세라 단숨에 적어 내려갔다. 오른손 옆에는 카페 이름이 새겨진 휴지가 젖은 채로 똘똘 뭉쳐있고, 그녀가 주문한 커피 잔 위로 하얀 아지랑이가 살포시 올라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유난히 날씨가 흐렸다. 우산을 새로 사야 하나 고민되는 찰나에 민정은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다 불현듯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주변 공기보다 훨씬 높은 온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 분자가 그 에너지를 흡수하여 연기 상태로 증발한다. 우리가 실제로 보는 연기는 사실 기체가 아닌 물방울들의 응축에 가깝다.
매주 화요일마다 개인 과외를 받는 학생에게 지난번 수업에서 설명했던 일반 과학의 한 부분이다. 일반 과학이라. 예전부터 민정은 이 교과명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공통 과학이라고 칭할 것이지 일반의, 평균적인, 보통이라는 뜻은 왠지 모르게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반의어를 사전에 검색해 보니 특수, 특정, 개별이라는 답변을 가져왔다. 정말 그럴까. 그녀가 떠올린 건 ‘비일반’이었다. 즉 비정상. 누구나 아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지식조차 배울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비정상적인 걸까. 과연 어떤 이가 일반과 비일반의 경계를 정하는 건가.
그런 인물을 염려하다가도 한 달에 한 번 학생의 어머니님이 형형색색의 과일과 함께 내어주시는 두터운 봉투를 꼬박꼬박 받아 갔다. 그 봉투의 두께가 월세와 공과금을 가려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빠져나가는 대출이자까지도. 숫자 0이 여러 개 붙어 가끔은 빠듯했다. 돌아오는 화요일이 남자친구와 100일이라며 몰래 수업을 빼달라는 학생의 간곡한 요청에도 그녀는 어김없이 그날의 진도를 나갔다.
고마운 게 참 많아요 우리 김 선생님한테. 우리 애가 지금 사춘기라…. 아유 난 말도 못 붙여. 내가 이번 달엔 더 넣었어요. 계속 잘 부탁해요.
학부모들은 민정에게 이런 말을 곧잘 하였고, 그녀는 제자식 하나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그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깊이 숙여 봉투를 받은 뒤 민정은 답했다.
뭘요,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OO이가 원체 똑똑한 거죠.
그날은 에너지가 어떻게 순환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고, 민정은 뜨거운 커피잔의 수증기를 빗대어 증발과 응결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 조막만 한 컵에서도 순환이 일어난다며 학생은 신기해했다. 민정도 지금 눈앞에 놓인 커피를 보며 생각한다. 그저 자연의 법칙대로 저항 없이 일어날 뿐이야. 갈색의 작은 바다에서 피어오른 희뿌연 수증기도 기체로 되었다가, 액체로 변한다. 환경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모습을 용이하게 바꾸는 것. 아마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수증기는 묻는다. 제 몸이 왜 자꾸 변하나요? 답변을 들을 새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가 가벼워졌다가를 반복한다.
엄마의 몸이 왜 자꾸 변하나요?
수술 부위의 흉터를 소독하는 간호사는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반짝거리는 명찰을 보아하니 연차가 낮은 간호사 같았다. 민정은 계속 질문했다. 점점 악화되는 것 같아요. 그제는 숨이 몇 초간 멈춘 듯했다니까요. 담당 선생님께 한번 여쭤봐 주세요. 간호사는 얼마간 심전도 모니터의 숫자를 지켜보는 시늉을 하다 나갔다. 민정은 일정한 리듬으로 오르내리는 선을 바라본다. 위로 빠르게 치솟다가 아래로 급격히 떨어짐을 반복한다. 엄마가 그려내는 악상이다.
언젠가 엄마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음악의 이해’ 같은 이름의 교양수업이었고,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 감상평을 제출하는 그런 과제였던 것 같다. 그때도 과외가 많았던 탓에 동기들과 시간이 맞지 않아 원래는 따로 보러 가려고 했었다. 어떡하지, 할 수 없지 와 같은 민정과 친한 동기와의 통화를 엄마가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민정아, 엄마 이런 공연은 처음이야. 엄마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 핸드폰 아예 껐지? 무음으로도 해두지 마. 그리고 중간에 나가기 어려우니까 화장실도 지금 다녀오고. 표 챙겨.
곧 공연이 시작된다는 안내방송 멘트가 흘러나오고 민정의 옆자리는 엄마의 핸드백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민정은 홀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그곳에 다다르니 엄마는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 우리 딸이랑 왔는데…… 저희도 표를 확인해야……까먹은……글쎄 표가 내 가방 안에…….
첫 번째 악장은 그럭저럭 집중할 수 있었다. 민정은 작은 메모장에 느낀 점을 적었다. 두 번째 악장이 시작되고 엄마는 다리를 이리저리 꼬아대기 시작했다. 일분 간격으로 왼쪽. 그리고 오른쪽으로. 그러다 코를 조금씩 훌쩍이더니 클라이맥스로 향해 갈수록 잔기침을 해댔다. 마지막 악장에서는 화음이 묘하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옆자리의 관객에게 자꾸만 의식이 빼앗겼다. 그러다 툭. 지휘봉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내, 결국, 툭. 그는 침착하게 공연을 이어나갔지만 그것은 나무 바닥 위에 납작하게 놓여있었다. 민정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지휘봉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심정지 상태의 평탄한 선이었다. 엄마가 지금 연주하고 있는 이 공연은 언제라도 툭 끊겨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일 년 전 폐암 중기라고 확정받았을 때 병원 진찰실의 커다란 모니터에 걸린 CT 스캔, 엑스레이, MRI의 데이터를 기억한다. 양쪽으로 펼쳐진 반원을 중심으로 비정상적인 허연 덩어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의사는 수술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민정은 그렇지 못했다. 말기도 아닌데 왜요. 왜 포기하냐고요. 쌓여가는 수술비와 각종 입원비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과외를 더 늘리면 됐었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면 해결될 일이었다. 반년 뒤 그 덩어리는 폐에서 간으로, 척추로, 그리고 뇌로 도달했다. 무제한적인 생명력. 어떠한 환경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들은 성장해 나갔다. 액체였다가, 기체였다가, 고체였다가 그랬다. 그래. 그들은 무엇이든 되었고 무질서한 침투력과 전이 능력은 한 에너지의 순환 시스템이었다. 엄마도 한동안 무엇이든 되었다가 비쩍 마른 지휘봉이 되었다. 침대 위 덩그러니 놓인 납작한 막대였다. 엄마의 연주는 끝이 났다.
커피가 식었다.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민정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물처럼 들이켰다. 더 이상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수증기의 발생은 멈추었고 증발은 완료되었다. 아까 전의 연기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여기 카페의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연신 들썩이는 민정의 어깨에 의해 가쁘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폐를 한차례 훑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또는 혈관을 타고 흘러가 수분으로 바뀌어 민정의 눈물주머니로 응축되었을 수도 있다.
핸드폰의 알람이 울린다. 다음 과외에 가기 위해 그녀는 부지런히 발을 옮긴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