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망
- 에티오피아 차갑게 한 잔이요.
남자는 생각한다. 오늘은 에티오피아네. 남자는 매주 수요일마다 들리는 카페에 앉아있다. 그 여자도 매주 수요일 열한 시 이십 분쯤이면 나타난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책을 읽는다. 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거라고 본다. 남자는 여자 앞에 큰 거울을 가져다 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혹시 지금 본인 표정이 어떤지 알고 있어요? 여기 거울을 한번 봐요. 여자의 책은 알랭 드 보통, 사강 등 프랑스 작가가 주를 이루었다. 가끔 전공 서적만 한 두께의 책도 거리낌 없이 들고 온다. 여자는 연필로 줄을 좍좍 그어가며 읽는다. 남자는 취향이라든지 스타일적인 면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다른 행성에서 온 우주인이라던가. 남자는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열두 시 사십 분. 여자가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나선다. 커피는 오늘도 반 이상 남아있었고 남자는 십분 뒤 자리를 떴다.
여자의 담당 선생님은 말한다. 환자분께서는요, 소비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믿음이 강한 편이에요. 이른바 실존적 공허라고도 하는데… 음 그러니까 값이 적게 나가든 많이 나가든 상관없이 어떤 것을 사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나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 배가 고프지 않은데 감정적 허기로 인해 굳이 군것질한다든지, 또 뭐가 있을까요… 호텔 레스토랑이나 부티크 스파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 고급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만끽한다든지 말이죠. 환자분 같은 경우엔 목적 없이 매일 카페에 들러 커피를 소비한다고 볼 수 있죠. 사람마다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접근해 보면 다 비슷해요. 운동을 한번 해보시는 건요? 가볍게 요가 추천드릴게요. 필라테스도 괜찮고요 또…….
남자는 생각한다. 그녀의 척추와 골반이 왼쪽으로 틀어져있다고. 일 년째 근무 중인 필라테스 센터의 오후 수업에서 수요일의 여자를 수강생으로 만났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어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특유의 음울한 표정이 약간의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다. 남자는 거울을 통해 여자의 체형을 바라봤다. 양 어깨는 동그랗게 말려있고 아랫배는 수납이 불가능한 물건처럼 훌쩍 튀어나와 있다. 그에 비해 허벅지와 종아리의 굵기는 비정상적으로 얇았다.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인상을 주는 생명체 같았다. 여자는 동일한 자세를 얼마간 유지할 때 잘되지 않아 머쓱한 웃음을 짓곤 하는데 그때마다 입꼬리가 왼쪽으로 올라갔다.
- 회원님 이렇게 계속 운동하는 것도 좋지만 근본적인 교정을 원하시면 평소 습관을 고치는 게 좋아요.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말씀드렸다시피 몸 전체가 왼쪽으로 틀어져 있어요. 우선 작은 것부터 해봐요. 다리 꼬기부터 고쳐봅시다.
반응이 없어 한 마디 덧붙인다. 남자는 곧바로 후회했다.
- 자기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해 보는 것도 좋아요. 본인도 몰랐던 독특한 습관이나 특징 같은 걸 알 수 있거든요.
- 선생님이 보기엔 어떤 거 같아요?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당황한 남자는 눈을 껌뻑였고 그 사이 여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 그러니까 선생님의 눈이 카메라라고 생각해 보면요. 제 독특한 특징이 뭔데요?
남자는 짐을 챙겨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봤다.
남자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자신이 조각가였다. 눈앞에 2미터가 훌쩍 넘는 새하얀 대리석이 놓여 있다. 조각해야겠다는 강력한 압박감이 들어 서둘러 바위를 깎아나갔다. 귀의 모양, 손가락과 발가락의 개수, 배꼽의 위치를 고려하여 깎다 보니 가느다란 목과 봉긋한 가슴이 생겨나고 기다란 다리가 바닥 위에 단단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이제 얼굴만 남았다. 그러다 점차 다리가 꼬아지고 목이 앞으로 길게 빠지면서 어깨가 동그랗게 굽어졌다. 척추와 골반이 이리저리 기울다가 결국 왼쪽으로 비틀렸다. 조각상이 남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 보기엔 어떤 거 같나요?
제게 독특한 무언가가 있나요?
남자는 꿈속에서조차 대답할 수 없었다. 네 입술이 자주 왼쪽으로 비뚤다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주고 싶다고. 그리고…그리고 또….
*
여자는 생각한다. 카페에 오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 좋아. 그 카페에는 대부분 1~2인 손님들이었다. 여러 종류의 드립 커피 중 오늘은 에티오피아를 골랐다. 통장 잔고는 조금씩 조금씩 느린 속도로 줄어들었고 그녀의 존재감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해의 장마로 노랗게 얼룩진 침대 쪽의 벽면, 창문을 열어두면 들리는 건너편 건물 여자의 독특한 재채기 소리, 새벽마다 바닥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쿵쿵 소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들어오는 햇빛을 한 아름 끌어안을 수 있는 넓은 창문 쪽의 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이 좋아 온몸이 간지러웠다. 잠깐 식물이 되어 광합성 작용을 느끼듯 가만히 앉아있었다. 진동이 울린다. 여자의 핸드폰엔 결제 내역과 잔액이 문자로 전송되어 있었다. 조용하기 짝이 없는 핸드폰에 알람이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순간을 여자는 좋아했다. 곧이어 문자 하나가 더 도착한다. 금일 14:00 시 예약 - XX상담센터
여자는 생각한다. 실존적 공허라. 난치성 희귀 질환 같은 독특한 개념이 문득 반가웠다. 여자의 입꼬리가 왼쪽으로 올라갔다. 희미한 테두리가 실존적 공허라는 거창한 개념으로 뚜렷해진 것 같았다. 여자의 테두리 안 쪽은 담당의의 말대로 텅 비어있었다. 그 빈 공간을 여자는 매일 아침마다 카페인으로, 재지한 음악으로, 넓은 공간으로, 프랑스 소설로, 활자로 채워나갔다. 이는 그녀의 유일무이한 루틴이었고, 의사의 제안으로 추천받은 필라테스가 새롭게 추가된 루틴이었으며 몇 달 만에 달라진 유일한 부분이었다.
어떤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매일 다른 카페에 간다. 그저 한 명의 손님으로써 하루도 빠짐없이 간다. 카페는 서너 군데 정도를 돌려 다닌다. 월요일의 카페, 화요일의 카페, 수요일의 카페… 다 다르다. 그날의 날씨와 습도, 아침의 기분과 꿈자리에 따라 가끔 조정될 때가 있지만 웬만하면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음...오늘은 수요일이다. 하지만 그냥 집에 있기로 한다.
어떤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매일 한 곳의 카페만 간다. 바리스타도, 사장도 아니다. 단지 손님으로써 간다. 카페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같은 곳에 앉아 노트를 펴 글을 쓴다.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생각들을 활자화하여 적어나간다. 탁해졌던 머리를 맑아지도록 애써본다. 동시에 왼쪽으로 입술이 비틀린 채로 웃는 여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여자를 만나게 되면 하게 될 말을 적어본다.
그러나 여전히 백지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