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새해가 된 걸까?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날짜가 “1월 1일 월요일”로 바뀌어 있었고 시간은 오전 8시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새해가 돼 버렸네’라고 심드렁한 감상을 펼친 후 어두운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아침 햇살을 시력으로 삼아 방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너저분한 책상과 의자, 벽에 기대어 세워 놓은 전신거울, 푸른색 이불이 거슬림 없이 내 눈을 스쳐 지나갔다. 바뀐 거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단지 온 세계가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말이다.
2024년이 도래한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은 칫솔질을 하면서도 계속되었다. ’단순히 숫자가 바뀐 걸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지 참! 대체 1월 1일이라는 개념을 누가 정한 거지? 4월 1일이 새해면 얼마나 좋을까? 벚꽃도 구경하고 말이야. 꼭 이렇게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서 새해가 돼야 해?‘ 엉뚱한 생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현재 전 세계가 2023년 12월 31일에서 2024년 1월 1일로 바뀌고 있다. 지구의 경도 15마다 시차가 생겨서 새해가 된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아직 12월 31일이다. 광막한 우주의 관점에서는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하며 대륙마다 시간대별로 거대한 불꽃놀이의 폭죽이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팡팡 터질 것이다. 어떤 외계의 존재가 이틀간의 지구를 바라보면 이게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하는 상상도 잠시 해보았다.
SNS에 접속해 피드나 스토리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3, 2, 1… 해피뉴이어!” 영상 속에는 카운트 다운 소리에 맞춰 불꽃이 화려하게 터지는 잠실 롯데타워가 등장했다. 예쁘다는 것보다 대신 ‘저 동네 사람들은 시끄러워서 잠은 어떻게 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주변은 고급 아파트와 호텔뿐이니 방음은 어련히 알아서 잘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이렇게나 냉소적인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머리가 띵했다. 사실 어제도 평소처럼 잠드는 시간에 자러 갔으니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에 있어서는 무신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흐르고 일상적인 하루에 금이 가버린 건 어느덧 보름이 지난 후였다.
뭐랄까, 온몸의 신경이 23년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실제 나의 육신은 회사에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화면의 오른쪽 하단을 보니 24년 1월 15일 월요일 나른한 오후 2시였다.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렵지만 정신의 어떠한 부분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결재 서류를 올릴 때 연도 기재를 틀리게 작성한 것은 기본이었고 자기소개 시 나이를 헷갈리는 건 덤이었다. 사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반복되는 현상이었기에 그렇게 유별나다고 느끼진 않았다. 문제는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할 때 극명히 드러났다. 신년회라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여 흥겹게 술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24년에 관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올해 새로운 계획 또는 목표에 대해 말할 때 특히 그랬다.
“나 올해엔 꼭 이직할 거야.”
“난 이번에는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읽어보려고.”
“지금 목표 말하기 타임이야? 그렇다면 나는 다이어트 성공 기원!”
다들 짠- 하고 잔을 부딪히며 다이어트는 몇 년째 말하고 있는 거냐며 그 친구를 놀려먹으면서 하하 호호 웃고 떠들었다. 분위기상 내가 말할 차례였다.
“내 목표는 말야,”
“너에게 올해 목표가 있다고?”
내 말을 싹둑 잘라버린 친구의 얼굴은 낯설었다. 그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똑바로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기묘한 분위기에 잠시 압도되었지만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진지한 건 아니지만 방금 하나 떠올랐어. 뭐냐면… 음….”
분명 무언가가 떠올랐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아예 기억을 담당하는 뉴런 한 조각이 통째로 사라진 느낌이었다. 골똘히 계속 생각하고 있자 자연스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흐름을 깨기 싫었기에 찝찝함을 간신히 부여잡고 남은 술잔을 들이켰다. 사실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오늘 회사에서도 연간계획서 발표 시간에도 유사한 기시감을 느꼈다. 24년에는 내가 맡은 업무 분장이 전년도에 비해 새롭게 추가되었는데 정작 팀장님이 발표할 때는 PPT 내용이 달라져 있었다. 추가되거나 수정된 부분은 없었고 그저 나의 업무는 작년과 동일한 분량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추후 팀장님과 개인 면담을 신청하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본인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고 했다. 의아했지만 개인적으로 회사에 대해 그렇게 열정적인 편도 아니고 승진에 대한 욕심도 없었기에 추가된 업무 없이 기존에 했던 일 그대로 이어서 하면 된다는 사실이 조금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한마디의 상의나 언급이 없었던 팀장님의 독단적인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아는 팀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기분이 묘하게 더러웠다. 세상 사람들 전부가 날 작년의 인간으로 취급하는 느낌이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24년을 향하여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듯했다. 일기를 쓰려다가 올해 무엇을 이루어볼까 하고 생각하기만 하면 눈앞은 안개 낀 것처럼 하얘지고 머리는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텅 비었다. 단순히 컨디션이 나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꺼림칙한 현상을 기정사실화 한 것은 지하철을 이용한 날에 벌어지고 말았다.
신년에는 대중교통 요금이 1,250원에서 1,400원으로 오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150원가량이지만 숫자 2와 4에서 느껴지는 차이가 꽤 크게 다가와서 용케도 기억했었다. 그러나 지하철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을 때 쌓이는 요금의 단위는 1,400원이 아닌 1,250원으로 오르고 있었다. 아직 계도기간인가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24년의 성인이라면 1,400원의 요금을 내는 게 24년의 인간이었다. 처음엔 내 카드가 잠시 오류를 일으킨 것이며 남들보다 150원의 이득을 보는 거라며 오히려 정신 승리했지만 뒤꽁무니에 남은 싸한 기분은 지우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확신했던 것 같다. 난 23년의 사람이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는 사실을.
영화 <트루먼 쇼>가 생각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삶이 점차 잿빛이 되어갔다. 자의식이 과하게 샘솟아 세상이 날 이렇게 억지로 까 내리나 싶어 미친년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쳇바퀴 같은 잘못된 굴레를 끊기 위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분명 해결의 열쇠는 나의 과거 행적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일기장이 가장 유력한 실마리라고 판단하여 지난 12월의 일기부터 차근히 읽어 나갔다. 29일…30일… 마침내 31일에 도달했을 때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유난 법석 떠는 인간들 다 꼴 보기 싫어. 새해라고 뭐가 달라진다고. 마치 31일에 모든 죄를 씻어내고 1월 1일이 되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듯 행동하는 게 멍청해 보인다]
다음 장을 넘기니 1일부터 보름이 흐른 오늘날까지 쓴 일기는 날짜만 남겨두고 내용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핑 하고 돌아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다.
*
저 멀리 외계의 존재가 보인다. 나와 닮았지만 인간은 아닌 게 확실하다. 나 지금 꿈속인 걸까. 그것은 나에게 다가와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때? 좀 즐거워?」
「아니. 그 반대야. 뭐가 뭔지 모르겠고 혼란스러워. 혹시 네가 이런 거니?」
「넌 세상 모든 존재를 비웃었어. 네 선조들까지 기만한 거야. 심지어 부모님과 친구들 모두를. 네 속에 흐르고 있는 피와 살을 비웃은 거지.」 그것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미안해. 사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어?」
난 괴로움을 호소하며 방법을 물었지만 그것은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기만 했다.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걸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고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것처럼 고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멍청한 바보가 아니었다.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0시가 되었을 때 소리 지르는 건 무사히 한해를 잘 살았다는 나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고,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정돈하여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것은 다음 삶도 잘살아 보겠다는 거룩한 행위였다. 인생을 꾸려가는 것에 있어 쌀쌀하고 비관적인 태도는 큰 방해물이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가슴을 닫아버렸기에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그러한 결론에 스스로 도달했을 때 외계의 존재는 나에게 말했다.
「옳지,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구나.」
이윽고 내 가슴은 활짝 열리며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것은 내 손을 잡아 이끌어 광활한 우주를 함께 날아다녔다. 여기에서 본 지구는 하얗고 푸르른 유리구슬 같았다. 곧이어 그 구슬 속에서 형형색색의 폭죽들이 영롱한 무지갯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무구하고도 성결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