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의 몸_안소민 41세 도쿄 대학교 법학부 수석 졸업, 글로벌 자동차 회사 법무팀 최연소 팀장, 6살 아들 엄마
“오늘 잘 다녀왔어?”
“응. 자기는 어땠어?”
“팀원들이랑 저녁 먹고 맥주 한잔하고 왔어.”
“요즘 자주 마시네.”
“그랬나? 시우 발표는?”
“제일 잘했지. 엄마들이 다 묻더라. 집에서 영어 따로 어떻게 봐주고 있냐고. 그래서 영어 책 선생님 알려줬지.”
“자기야 뭐든 똑 소리 나게 잘 알아보고 하잖아.”
남편이 씻고 나오자 소민은 씻으러 들어간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이 어깨에 닿자 그제야 하루 종일 잔뜩 힘이 들어갔던 몸이 풀리는 것 같다. 눈 전용 클렌저를 화장 솜에 적셔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를 닦고 피부 전용 클렌징 워터로 파운데이션과 선크림을 닦은 후 촘촘한 거품으로 마지막 세안을 한다. 얼굴을 감싸던 안전장치들을 한 겹 두 겹 벗겨내자 마침내 소민의 피부가 숨을 쉰다. 정말 가볍다. 이런 맨 얼굴로 누군가를 만나거나 외출한 적이 있었던가. 남편에게도 완전한 맨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늘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 샤워를 한 후 화장을 했고 남편이 씻은 후 화장을 지웠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이 개운한 느낌도 잠시, 컨실러와 파운데이션으로 가려 온 턱과 입 주변의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좋아졌다 싶으면 불쑥 올라오는 뾰루지와 원인 불명의 트러블들. 오늘 갔던 L 카페의 통 창 아래에서 이 뾰루지들이 시우네 반 엄마들에게 도드라져 보이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기분이 확 가라앉는다. 그녀는 맨 얼굴을 보는 게 싫었다. 유명하다는 피부과에서 시술을 받아도, 좋다는 화장품과 미용 기기들로 관리를 해 보아도 그녀가 원하는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가 되지는 않았다.
“꺅!!! 내가 나 설레어!!”
“나도 떨린다. 빨리 열어봐.”
“얼굴도 잘 생겨, 키도 커, 공부도 잘해, 거기에 로맨틱하기까지.”
교실에 도착하니 다른 반 아이들까지 재희의 자리에 모여 있었다. 옆 남자 고등학교의 학생 회장인 준호 오빠가 조금 전 재희에게 고백을 했단다. 학교 벽에 현수막을 걸고, 정문 근처에서 재희가 좋아하는 인형이 가득 담긴 꽃 바구니와 편지를 건네어 주변 친구들도 모두 흥분 상태였다. 한수 고등학교 학생 회장이자 연합 동아리 단장인 준호 오빠는 이 근처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공부면 공부, 농구면 농구, 거기에 외모와 리더십까지 다 갖춘 엄마 친구 아들의 표본이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소민도 준호 오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만난 적이 있었다. 소민이 오답 노트를 보며 길을 걷다 흘린 파우치를 주어 그녀에게 건네던 손길을 따라 올려다보니, 만화 속 남자 주인공 같은 환한 미소의 미소년이 서 있었다. 고운 얼굴과 상반된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몸까지 소민의 눈으로 들어왔다. 그는 파우치 속에서 떨어진 거울까지 건넨 뒤 사라졌고 소민은 한 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준호라는 이름만 들어도 나대는 심장, 독서실이었다면 그녀의 심장 소리가 옆 자리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교실에서도, 급식 실에서도, 실험실에서도, 재희네 집에서도, 웃으며 파우치를 건네주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준호 오빠가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이 하필이면 재희라니... 하필이면.!
큰 눈, 오뚝한 코 같이 전형적인 미인의 이목구비는 아니었지만 웃을 때 재희는 정말 예뻤다. 반달눈이 되어 입꼬리가 싹 올라가며 웃는 재희를 볼 때면 여자가 봐도 반할 만큼 환하고 빛이 났다. 소민과 재희는 과학 시간 같은 조가 되며 친해졌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며 유한 성격의 재희는 소민이 힘들어할 때마다 위로와 응원을 해 주었고 둘은 함께 학교와 독서실, 그리고 서로의 집에서 공부를 하며 상대의 꿈을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었다. 소민은 재희가 좋았다.
그런데 준호 오빠까지 재희에게 고백을 하니, 점점 마음이 이상했다. 하교 길에 떡볶이를 먹을 때나 독서실 휴게실에 있을 때, 연합 동아리에서 공연 연습을 할 때 등 언제 어디서나 하얀 피부에 웃는 얼굴의 재희는 환영을 받았다. 재희를 향한 시선과 관심을 그저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소민은 그녀를 따라 해 보기도 부러워하기도 질투가 나기도 했다. 재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모에 대한 자신감은 점점 하락했고, 그럴수록 소민은 더욱더 공부에 매진했다. 시험 성적이 나올 때면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은 소민에게 모여들었다. 그녀의 공부 방법을 궁금해했고 오답 노트 정리 법을 공유받고 싶어 했다. 소민은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 찰나가 지나면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이 사라질까 봐,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잊을까 봐 불안했다. 그럴 때면 소민은 늘 한쪽 머리가 아팠고. 참다 참다 진통제 한 알을 삼켰다. 소민의 파우치에는 거울, 소화제와 두통약이 항상 들어 있었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면 많은 것이 바뀔 거라고 믿었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나 자신감 결여도 함께. 소민은 이미 부족한 잠을 더 줄여 박차를 가했다. 문제를 풀었고 오답노트를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키는 바꿀 수 없으니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부위들에 집중했다. 대학에 입학했어도 여전히 잠을 줄여야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화장을 하고 머리를 세팅해야 했기 때문이다. 패션 잡지를 구독하여 트렌디한 브랜드의 핫한 아이템을 구매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많은 것들이 소민의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학부 공부는 물론, 자격증 시험, 취업 준비까지 소민은 1분 1초도 허투루 낭비되는 시간이 없도록 철저하게 하루를 계획하며, 자신이 세운 목표들을 하나씩 이뤄 나갔다.
자꾸 눈길이 가는 여자, 함께 있고 싶은 사람, 사랑받는 아내, 인기 많은 동료, 잘나고 유능한 팀장, 자랑스러운 딸, 소민이 되고자 했던 모든 모습들은 그녀 자신이 아닌 상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상대에게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소민이 존재할 수 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도넛 한 박스를 해치우고 죄책감으로 밤새 줄넘기를 했던 날, 그토록 고대하던 고등학교 동창 모임 날, 뒤집어진 피부를 보며 몸이 아파 참석이 어렵다고 둘러대며 약속에 가지 못한 날, 몇 년을 홀로 좋아했던 준호 오빠의 연락에도 정작 본심을 말하지 못했던 그날도 소민은 혼자 감당했다. 누구에게도 힘든 마음,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털어놓지 못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은 분명 실망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감추고 싶은 피부 트러블, 탈모, 초라함은 철저히 가렸다. 최상의 모습만을 보여주며 사는 인생은 참 많이 힘들고 고되었다. 이미 너무나 열심히, 애쓰며 살아온 결과로 이루고자 했던 목표들을 성취했지만, 본인도 모르게 내재화된 완벽함이라는 허상은 그녀를 더욱 채찍질했다. 멈출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져야 했고 더 성공해야 했고 더 인정받아야 했다.
그리고 오늘, 시우의 부모 참여 수업에서 만난 Olivia의 엄마 윤아를 보며, 그녀는 형용할 수 없지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식지 않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윤아 엄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실수와 실패에 솔직했다. 겸손하면서 소탈했고 상대의 말에는 진심을 다해 귀 기울였다. 이런 그녀의 태도는 수수한 외모를 단아하면서도 고상한 분위기로 만들어 주었다.
그거였다. 소민은 맨 얼굴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 두꺼운 화장으로 가린 얼굴 말고, 말간 맨 얼굴로 남편과 대화하고, 완벽하게 꾸미지 않고도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먹는 일상 말이다. 최상이 모습이 아닌 상태라는 생각이 들 때면 소민의 어깨는 치솟았고 뒷 목은 경직되었으며 미간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었다. 매 순간 상대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법을 경험하지 못했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진솔한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