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민은 몸의 이상징후를 느꼈다. 밤낮없이 사랑을 나누던 금슬 좋은 부부에게 허니문 베이비가 찾아왔다. 고이 기른 어여쁜 첫째 딸이 본인의 삶을 더 즐기고 누리다 연애도 몇 번 해본 후 결혼하기를 소망했던 엄마, 아빠도 지민에게 아기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 지민의 친구들은 물론, 그녀를 따르던 지수의 친구들까지 신기해하며 그녀의 몸에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를 설레고 행복하게 만들던 그녀의 첫 번째 임신은 정기 점진 차 방문한 산부인과 담당의사에게 계류 유산 판정을 받으며 떠나보내게 되었다. 아기가 왔을 때 감지된 미세한 몸의 변화는 정작 아기가 지민의 몸을 떠나갈 때는 느껴지지 않았다. 신혼집을 정리한다고 무리를 해서일까,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려고 마신 디카페인 커피 때문일까, 결혼식 앨범이 기대에 한참 못 미쳐 속상해한 탓일까. 지민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인지 아니면 해야 했을 무언가를 놓쳐서 아기가 잘못된 것일까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다. 며칠 뒤, 피검사와 소변 검사를 마친 뒤 진행 된 소파술은 간단했다. 다정하고위트 있던 의사 선생님은 유산도 출산과 똑같이 몸조리가 필요하니 최대한 마음 편하게 회복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돌아 서며 엄마가 무엇을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절대 아니니 자책은 금물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건네고 갔다.
지민의 엄마는 소고기 편백찜, 전복죽, 파래 전, 감태 주먹밥 등 유산 후 몸조리에 좋다는 고단백, 해조류를 다양한 조리법으로 만들어 지민에게 가져다주었다. 엄마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상가롭고 다정다감한 지민의 까만 눈동자에는 그녀의 엄마만이 감지할 수 있는 슬픔이 배어있었다. 엄마의 극진한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들 덕분에 지민의 몸은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그저 퇴근 후 형준이 좋아하는 김밥을 싸기 위해 당근을 채로 썰고 있을 때나 누워서 추리 소설을 읽고 있을 때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눈물이 터져 나오곤 했다. 소리도 없이 흐느끼는 지민을 발견할 때마다 형준은 아직도 그러는 거냐고, 어서 잊어버리라며 지민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는 소리를 해댔다.
만취해 들어온 형준은 자고 있던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거부할 틈도 없이 형준은 지민을 탐했다. 형준의 몸 구석구석과 두피에서는 고기 탄 내, 기름 쩔은 내가 풍겨왔고 입에서는 술 냄새가, 목덜미 근처에서는 어렴풋이 시트러스 계열과 머스크 향이 혼재된 듯한 향수 냄새가 났는데 이 모든 게 마구잡이로 섞여 한번에 들어올 때는 구역질이 날 뻔했다. 욕정이 충족된 형준은 이내 잠들었고 코가 막히는지 입으로 숨을 쉬어대는 통에 지민은 고스란히 역겨운 냄새에 노출되었다. 슬프고 처량한 밤이었다. 이런 식의 패턴이 몇 차례 이어졌다. 이 십 대 초반이던 지민은 곧 임신이 되었고, 이 번에도 원인 불명으로 유산했다. 임신 8주 차였다. 이후에도또 한 번의 유산을 겪은 지민은 건강과 체력 증진을 위해 걷기를 시작하였고 그동안 소홀했던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마음이 유독 힘들 때면브람스 왈츠 15번을 연주했다. 치고 또 치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조금 나아져 있었다.
"지민아, 잘 지내지?"
"언니!!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응, 지난주에 한국 왔어. 광화문에 우리 자주 가던 그 국숫집 있잖아. 거기 지나가는데 너 생각나서 연락했지."
"고마워요, 언니. 거기 진짜 맛있었는데 안 간지 오래됐네요. 이번에는 얼마나 계세요?"
"한 4주 정도 있을 것 같아. 가기 전에 만나야지."
"당연하죠! 가끔 언니 생각 하는데 연락은 자주 못했어요."
"그럼, 너도 결혼해서 남편도 챙겨야 하고 얼마나 바빠."
주아 선배의 추천으로 시립 합창단 소속 피아니스트 채용 공고에 지원을 했고, 얼마 후 지민은 그곳의 소속 단원이 되었다.
지방 유지였던 할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형준의 아빠는 사람 좋고 사람 좋아하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형, 동생, 선후배,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남자. 형준의 아빠는 동네 형님의 꼬드김에 넘어가 사업을 확장했고, 전혀 모르는 분야에까지 형님이라는 작자의 말만 믿고 대출까지 받아 투자를 했다. 본인만 믿으라며 장담하던 동네 형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수소문 끝에 그는 사기 혐의로 고소당한 것만 몇 건이라는 소식만 확인되었다.
형준의 할아버지가 안 먹고 안 마시고 육십 평생을 일만 하며 일궈 놓은 가업은 물론, 형제들 중 맏이인 형준의 아빠에게만 물려준 청주의 아파트와 일대의 땅까지 모두 날아갔다. 각자 방을 쓰며 부족함 없이 살던 형준네 사 남매는 두 개의 방에 작은 부엌이 유일한 공용 공간인 허름한 다세대 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 여섯 가지 반찬에 웃음소리가 나던 저녁 식사 시간은 쉬다 못해 군내가 나는 김치와 김으로 대체되었다.
3남 1녀의 차남인 형준에게 가족들의 기대가 점점 쏠렸다. 장남은 가세가 기울며 집밖으로 나돌았다. 자기 앞가림이나 하면 다행인 인물이었다. 셋째는 딸이었고, 넷째는 너무 어렸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형준이 이 폭삭 망한 집안을 일으켜 줄 유일한 자식이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첫째도 안정, 둘째도 안정이 깊게 뿌리 박힌 형준의 엄마는 안정된 소속과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 자리에 형준이 앉기를 바랐다. 고시에는 전혀 뜻이 없던 형준은 엄마와 아빠의 설득에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을 진즉 졸업하고도 여전히 형준은 고시원에 있었다. 합격이라는 해피엔딩으로 좁디좁은 고시원을 탈출할 형준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그리고 그녀 자신의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형준의 엄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를 나갔다. 절절함 가득한 기도를 마친 후에는 형준의 뒷바라지를 위해 청소를 하는 건물로 향했다. 그녀의 정성 어린 기도에도 불구하고 형준은 몇 년째 3평짜리 고시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판에 형준은 뜬끔없이 결혼을 하겠다며 여자를 데려왔다. 아직 학생 티가 나는 뽀얀 얼굴에 고운 아이였다. 잔뜩 긴장을 해서 그런지 볼 옆이 계속 떨리긴 했지만 살짝 보이는 보조개가 예뻤고, 참하고 공손하니 가정교육도 잘 받은 집 처자 같았다. 지금은 형준이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라 결혼은 시기상조라 말했건만, 둘은 확고했다. 지민은 형준을 잘 따랐다. 고시 공부 하는 사람은 잘 먹어야 한다며 밥이며 반찬이며 형준이 좋아하는 것들을 해다 고시원으로 날라주고 있었다. 지금도 저리 잘하는데 결혼하면 형준의 뒷바라지는 문제없겠다 싶어 형준의 엄마는 결혼을 승낙했다. 형준의 아빠도 이야기를 듣더니 그게 낫겠다 싶어 오히려 서두르기까지 했다.
지민은 주말이면 형준과 함께 그의 집에 방문했다. 어머님은 이제 오빠 걱정 그만하시고, 청소 일도 쉬셔도 된다며 설거지까지 하겠다는 지민과 가만히 앉아 깎아놓은 복숭아가 맛이 덜 들었다느니 하며 툴툴대면서도 잘만 받아먹고 있는 딸을 번갈아 보았다. 결혼식은 형준 부모의 뜻대로 성당에서 진행하였고, 신혼 생활은 지민의 아빠가 마련해 준 서울 북부의 빌라에서 시작하였다. 신혼집에 놀러 온 형준의 부모는 집과 주변 환경에 대해서 아쉬운 소리를 했다. 경제적인 지원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본인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데는 적극적이었던 형준의 부모를 보며, 지민은 마음이 살짝 상하긴 했지만 시부모로서 그럴 수 있다고, 이 정도면 좋으신 부모님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사랑하는 형준과 그의 부모를 위해 최선을 다해 며느리의 도리를 해나갔다. 형준의 생일에도, 형준의 부모의 생일에도, 시동생들의 생일에도 지민은 앞치마를 두른 채 음식을 나르고 끝도 없이 나오는 그릇들을 치우고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