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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Nov 22. 2023

개천은 알고 있다

찌질한 우리의 역사를

집 앞 개천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날 좋은 여름엔 수영하고 고기 잡으며 놀았고 겨울엔 썰매를 탔다. 형제들과 동네 애들까지 합하면 사람 수도 적지 않았기에 뭘 하고 놀아도 재미있었다. 그만큼 개천에 얽힌 일화도 적지 않다.




나는 엄마 일손을 돕는 착한 딸로 거듭났지만 남자애 못지않은 활동량으로 여전히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곤 했다. 하루는 엄마가 사준 새 슬리퍼를 신고 하릴없이 집 주위를 돌아다녔다. 비가 많이 온 직후여서 개천이 눈에 띄게 불어 있었고 물살도 전에 없이 빨랐다. 평소엔 얌전하기만 했던 것이 갑자기 날뛰는 것이 신기했는지, 나는 홀린 듯이 물살에 발 한 짝을 슬며시 집어넣어 보았다.


내 작은 몸이 물살에 훅 딸려 들어갔다.


"끼악!"


나는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수심이 깊지 않은 개천가였기에 엉금엉금 기어 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고 말았다. 난 얼른 손을 뻗었지만 신발은 마침내 자유라는 듯 잽싸게 달아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죽음 직전에 간신히 살아 돌아왔건만, 엄만 그걸 기뻐하기보다 새로 사준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화만 낼 것 같았다. 슬픈 예감은 틀린 법이 없다고 했던가. 엄만 흠뻑 젖은 꼴로 새 신발 한 짝을 손에 들고 우는 날 보고 사태 파악을 하자마자 조용히 빗자루를 들었다.


갖고 있는 개천 사진이 이것뿐이라서




언니는 어릴 때부터 전설의 고향 마니아였다. 무섭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벌벌 떠는 주제에 왜 매번 챙겨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내 다리 내놔'였다. 한 효자가 어머니 병을 고치기 위해 갓 묻힌 시체 다리를 잘라온다. 그걸 푹 고아 먹이면 어머니가 나을 수 있다기에.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 다리를 잘라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달려가는데, 다리 잘린 귀신이 깽깽이 발로 쫓아오며 "내 다리 내놔!" 하고 외쳤다는 이야기.


언닌 잠자리에서 우리 세 사람을 붙잡고 그 무서운 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려주었다. 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콧방귀를 뀌었지만, 어느 을씨년스러운 가을에 사건은 벌어지고 말았다.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길이었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늦가을인 데다 유난히 하늘이 꾸물대며 어둑어둑했다. 개천 건너편에서 집으로 가려는데, 그날따라 개천 주변 갈대가 유난히 높고 무성해 보였다. 딱 전설의 고향에 나올 만한 환경이었다. 그때, 문득 '내 다리 내놔'가 떠올랐다. 누군가 잘린 다리를 품에 안은 채 깽깽이로 날 쫓아올 것만 같았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으아아!!"


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번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철퍼덕!'


넘어졌다. 하지만 엎어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발버둥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생쇼도 그런 생쇼가 없었다. 집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숨을 헐떡이며 문고리를 붙잡고 한참을 기다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날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오면 개천은 무섭게 불었다. 개천이 불면 나무다리가 떠내려갔다. 처음으로 나무다리가 떠내려간 날, 우린 발을 동동 굴렀다. 학교에 가려면 개천을 건너야 했는데 그 나무다리가 유일한 방도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애초에 우리에게 상장 같은 건 바라지 않았지만 개근상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하늘이 무너져도 결석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리가 떠내려갔으니 오늘은 학교 안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순간, 아빠가 등장했다.


아빤 언니부터 업었다. 그리고 개천으로 들어갔다. 물이 아빠 가슴께까지 차 있었다. 아빤 언니가 젖지 않도록 최대한 언니를 위로 치켜 업고 천천히 개천을 건넜다. 그다음은 나였다. 우린 무사히 개천을 건넜고, 아빤 학교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든 다음 젖은 몸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우린 말없이 학교로 향했다.


"훌쩍훌쩍"


"?"


난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울고 있었다.


"왜 울어?"


학교 가는 게 그렇게 억울한가?


"훌쩍, 아빠가 너무 불쌍해. 나 아빠한테 효도할 거야. 아빠한테 진짜 잘해줄 거야."


"?"


난 언니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울 일인가?


내가 그 당시 언니를 이해하지 못한 건 나의 선견지명 같은 거였다. 훗날 언니는 그 누구보다 화려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엄마 아빠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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