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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누 Nov 01. 2023

2. 병원에서의 21일, 입원 기록

살면서 가장 큰 이벤트

병원에서의 21일, 입원 기록

0일 ~ 1일 차_2023년 9월 5일 (화요일) ~ 6일 (수요일)

전조 증상은 있었다.


전날부터 무척이나 배가 아팠다. 처음엔 배에 가스가 가득 차 부풀어 올랐고, 다음엔 구토를 했다

구토를 했을 때는 초록색 물이 나왔다. 위액은 원래 노란색인데 초록색이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복통 때문에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병원에서 알게 되었는데 담즙이라고 하는 소화액이었다.

밤새 복통에 시달린 채로 잠 한숨 못 자고 출근하였다. 자연 치유될 줄 알았던 복통은 계속 이어졌고, 점심시간에 급히 회사 근처 내과에 방문해 약처방을 받고 왔지만, 복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극심한 복통에 결국 반차를 사용하고 집에 와서 바로 누웠다. 밤 12시까지 복통이 멈추지 않아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택시를 호출하여 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굉장히 미련했다. 퇴근 이후 바로 병원에 갔어야 될 것을 자연 치유라는 허무맹랑한 신념으로 버텼으니 말이다.


엑스레이 검사 후에 의사가 다급히 오더니 복막염이 의심된다며, 급히 ct 촬영을 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복막염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검색해 보니 '천공'이라 하며 장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후에 Ct촬영을 진행했고 복막염 응급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응급실에 가는 택시 안에서 난 수액 맞고 새벽까지 쉬었다가 내일 연차를 쓰며 집에서 편안히 보내야겠단 생각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심각해져 갔다.


진통제로 복통은 멈추었고,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인생이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해당 병원에서는 수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원하는 병원을 수소문해서 알아봐 줬지만, 모두 안된다는 답변이었다.

결국 국가에서 주관하는 응급 시스템에 등록되었고, 오산 한국병원에서 가능하다고 연락이 왔다.

수술을 위한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전달받았다.


부모님께 새벽 4시에 급히 전화를 드렸다. 새벽 아들의 전화에 많이 놀라실 부모님을 걱정하면서 첫마디를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이 고뇌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아빠, 놀라지 말고 들어봐.

내 첫마디였다. 그리고 덤덤히 상황을 설명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하고 오산 한국병원으로 와야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응급차가 오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예약 메시지로 회사 부장님과 여자 친구에게 상황에 대한 내용을 남겼다. 오전 9시에 받아볼 수 있게 했다.


사설 응급차로 이동하였고,  오산 한국병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여러 가지 수술 동의서와 수술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제일 고통스러웠던 건 오줌줄을 심는 거였다. 수치스럽고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그때까지도 믿기지 않았고,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 깬 나에게 어떤 세상이 찾아올지 궁금했다. 그 세상은 나에게 천국일지 지옥일지 말이다.


아빠가 도착했고, 의연하게 난 괜찮다고만 했다. 사실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왔어?"라고 말한 것 같다.

이윽고 수술실로 향한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아빠가 간호사분께 애엄마도 같이 왔으니 보고 가자며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엄마가 금세 도착하여 잘 될 것이니 걱정 말고 잘 받고 오라 하였다. 지금 글은 쓰는 순간에 기억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당시에는 의연하게 알겠다고 괜찮다고 전했던 것 같다.


수술실에 도착하였고, 병원 침대에서 차가운 수술대 위로 몸을 옮겼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뚫어놓은 주삿바늘로 마취약을 넣으려고 하고 내입엔 산소마스크가 씌워지려고 하는 찰나에 눈이 감겼다.

곧 "환자분 깨어나세요"란 간호사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배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고, 병실로 옮겨졌다.

참고로 수술은 배꼽을 중심으로 세로 방향으로 17Cm 정도를 절개하고 우측의 천공이 난 장을 1m가량 잘라내는 수술을 진행했다.


절개된 배를 중심으로 참을 수 없는 아픔에 몸을 뒤척였고, 느끼지 못했는데 내 뒤쪽이 피로 얼룩져 젖어 있다고 했다.

간호사분들이 젖은 환자복을 갈아입히려 하였고, 바지는 괜찮았지만 상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괜찮다며 내버려 두라고 했다.

사실 수술 부위의 통증도 통증이지만, 나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전조 증상이 충분히 있었는데 대처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이 사태까지 오게 만든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하늘도 원망하지 못할 만큼  온전히 내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한심스러움 때문에 더 아프다며 짜증을 내었다. 벽을 치기도 하고, 한쪽 벽을 바라보고 누워 부모님에게 계속 아프다고만 했다. 마취약이 덜 깬 상태이기도 했다.

이후에 부모님이 가신다고 했는데 내심 무엇인가 서운했다. 전혀 서운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옆에 있는 것이 죄송하고 한편으론 크게 간병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서 가라고 보낼 줄 알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 줄이야.


부모님이 가시고, 마취약에 취한 상태로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통증은 계속되어서 간호사를 호출하여 진통제를 놔달라고 했다. 진통제의 간격이 너무 짧아 간호사가 많이 맞았다며 못 드린다고 할 정도로 계속해서 진통제를 요구했다.

이후에 오후쯤 정신 차려 회사에 연락을 했는데 그때 난 그것이 수술 다음날 오후 5시인 줄 알았다. 다음날 보니 수술 당일 5시에 연락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마취에 취하고 통증이 계속되는 상태로 하루가 지나갔다.



2일 차_2023년 9월 7일 (목요일)

새벽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수술 이전에 불면증으로 한동안 고생을 해서 입원 후 잠만 잘 줄 알았는데 한숨도 오지 않았다. 후에 속이 불편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공감이 갔다.

마취가 모두 풀리고 정신이 돌아오면서 같은 병실에 있던 분들이 점점 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아직 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한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깐 입원한 병실에 대해 설명하자면 4인 1실의 병동이었다. 특이한 점은 일반 병동보다 하루 입원비가 더 비싸지만, 간호조무사분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각자의 침대에 벨이 있었는데 해당 벨을 누르면 조무사분들이 왔고,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수술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하다못해 침대 각도 조절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


2일 차에는 한 손에 핸드폰을 쥔 채로 눈만 깜박이며 누워 하루를 보낸 기억이다. 중간중간 수술 부위 통증이 심해 진통제를 투입하였다. 무통 주사라는 것을 달고 있었는데, 마약과 같은 성분이기 때문에 잦은 간격으로 투여하지 못하고, 15분마다 투여가 가능했다. 첫날에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막 눌러서 잘 사용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요령이 생겨 15분마다 잘 누를 수 있었다.


오후에 아빠가 왔고, 이것저것 짐을 많이 싸가지고 와서 짜증을 내었다. 아직 필요도 없는 것을 왜 이리 많이 가지고 왔냐며 말이다. 그냥 넘어갈 수 도 있는 일인데 짜증 낼 대상을 찾고 있었던 듯하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라는 생각만 있었다.


소변 주머니를 차고 있어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종일 누워만 있었다. 어떤 움직임을 취할 때 배에 힘이 들어가는 행동이 많다는 걸 처음 깨닫게 되었다. 어떤 움직임이든 배에 힘이 들어갔고, 통증이 심해 움직일 수 없었다. 앉아있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에 종일 누워만 있었다.



3일 차_2023년 9월 8일 (금요일)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전에도 잠을 안 잔 상태였기에 '사람이 이렇게 잠을 안 잘 수도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잠을 안 자 낮에라도 잠이 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첫날엔 옆으로 눕는 게 가능했는데 이젠 그렇지 못했다. 옆으로 누우려고 하면 배에 통증이 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첫날은 마취에 덜 깬 상태여서 가능했나 보다. 줄 곧 일자로 곧게 누워만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오줌주머니를 떼고 이제 혼자 화장실 가는 것부터 움직여 보자고 하였다. 난 분명 토요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떼자는 말에 토요일부터라고 하지 않았냐며 하루 미뤘다.

그만큼 움직이기 싫었다.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통증이 아직 심해 비싼 주사제인 무통 주사를 하나 더 이용한다고 할 정도였다.


엑스레이 검사와 Ct촬영을 진행했는데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내일 소변 주머니를 제거하고 화장실을 다녀야 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미세하게 방귀가 나와 말을 전했는데 오후에 의사가 심각하게 와서 Ct 결과에 대해 말해주었다. 장에 아직 변이 차있는 부분이 있으며 어쩌면 수술이 한차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한번 더 수술을 해야 한다니 말이다. 이미 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했는데 한번 더 장을 잘라야 하는 것이었다.


우선 장 내시경을 해보자 하였다. 마침 대학교 간호학과 학생들이 병원 실습을 위해 내시경실에 가득 있었다. 10명이 넘어 보였다. 젊은 친구들 앞에서 내시경을 해야 했었다. 그것도 위가 아닌 장이었다. 창피하면서도 당장은 수술에 대한 걱정이 컸다.

이윽고 내시경을 진행했다. 의사가 중간에 배를 눌렀는데 통증이 왔고 가스가 배출되었다.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도 아직 배에 가스와 변이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우선은 지켜보자는 말과 함께 많이 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난 물도 마시지 못하는 금식이었는데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물은 이제 마셔도 된다고 들었고, 물을 반 병 마셨다. 간호사가 문득 나에게 '물 안 마시고 있죠'라고 하였는데 난 '어? 마시는 거 아니었냐'며 휘둥그레 쳐다보았다. 간호사가 놀라면서 아니라고 하며 나갔는데 나가면서 하는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000님 물 마셨대요!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 생각했다. 그렇게 병원에서의 3일 차가 지나갔다.



4일 차_2023년 9월 9일 (토요일)

금식은 힘든 수행이다. 물도 먹을 수 없는 금식에 고통스러웠고 간간히 탕비실 정수기 물로 입을 헹구고 조금 삼켜 버텨냈다.


토요일이지만, 병원에 주말은 없다. 모두 똑같은 날의 반복되는 하루다. 어제 의사의 2차 수술이란 말에 충격을 받고, 열심히 걷고 움직이려 했다.


오후에 여자 친구와 부모님이 동시에 찾아왔다.

당초 오늘 여자 친구를 부모님께 인사시키려 계획했는데 급작스런 수술로 병원에서 인사를 시켰다. 나이가 결혼 적령기를 넘긴 상태여서 결혼을 미룰 수 없었고, 지난주에 여자 친구 부모님께 난 인사를 다녀온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부모님과 여자친구가 첫 만남을 하게 되었다.

몸 상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와 결혼식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금세 점심시간이 되어 셋이 점심 먹으러 가라 보냈다.


난 장 안에 아직 남아있는 가스와 변을 나오게 하기 위해 열심히 걸으려 하였다. 걷는 건 가능했지만, 구부정한 자세였다. 허리를 피면 실밥에 묶인 배가 땅겼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어 누웠고 피곤해서 그런지 이윽고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에 머릿속에는 음식 생각이 가득했다. 금식의 후유증이다. 먹고 싶은 음식과 음료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외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가득했다.



5일 차 ~ 11일 차_2023년 9월 10일 (일요일) ~ 16일 (토요일)

변이 많이는 아니지만 알갱이로 계속 나오고 있었다. 2차 수술이 의사도 부담스러웠는지 계속 경과를 지켜만 보았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금식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다.


금식은 사람을 갈망하게 만든다. 머릿속에는 먹고 싶은 것만 떠올랐다. 치킨과 이온음료가 제일 많이 생각났다. 우연히 MBC TV 예능 중에 '전지적 참견 시점'이란 프로에서 '이국주'가 출연한 편을 보게 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이국주는 이온음료+비타 500을 섞어서 동료들에게 대접했는데, 이온음료가 무척이나 먹고 싶었던 나에겐 큰 대리 만족이었다.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는지 모른다.

TV는 항상 먹는 장면 위주로 보았다. 그런 것들이 아니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0일 이상의 금식을 짜증 없이 지내고 있는 '내가 뿌듯하다'라고 생각할 정도의 강한 인내의 연속이었다.

너무 힘든 10일이었다. '금식과 물도 못 먹는 고통'+'수술에 대한 걱정'으로 매일 뜬눈으로 지새우거나 공허하게 멍 때린 하루하루였다.


배변 활동은 계속 있었다. 먹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안에 있던 변이 조금씩 나온 것이다. 처음엔 수액으로 발생되는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단 의사 선생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 있는 변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2차 수술을 안 하기로 결정하였고, 수요일부터 죽을 먹기로 하였다. 당시에 의사 옆에서 배변활동을 잘하고 있다고 전해준 간호사분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제일 먼저 부모님께 전화했다. 그동안 누구보다 걱정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 '얼른 무엇이라도 먹어야 힘이 나고 퇴원을 해야 하는데'라며 걱정하셨는데 이제는 첫 단추를 끼운 상황이 되었다.



12일 차_2023년 9월 17일 (일요일)

오래간만에 수면을 취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장이 점점 안정되면서 편안해지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나 싶었다.

앞으로의 식사를 위해 전날 오후에 코와 연결된 담즙 기관을 제거했다. 다들 답답한 게 없어져 시원하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나 또한 이제 코에 연결되어 있는 게 없어져서 행동하는데 편해 좋았는데 얼마 가지 못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자꾸만 속에서 담즙으로 인한 트림이 나왔고, 그 양은 점점 심해졌다. 이윽고 토요일 밤부터는 담즙이 쏟아져 나와 결국 구토로 이어졌다. 난 1시간 단위로 구토를 하였고, 간호사에게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버티라고만 했다. 주말이라 의사에게 전달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일요일 아침에 구토의 양은 정말 심해졌고, 난 얼른 의사에게 전해달라고 애원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바로 의사에게 연락하여 뺐던 호스를 다시 연결하기로 하였다.


연결하시는 전문 선생님이 오셔 코에 기관을 다시 넣는데 구토가 계속 나왔다. 관이 입천장에 느껴지지 않게 연결해야 하는데 자꾸 잘못 삽입되었고, 토는 계속 나와 환자복과 침대가 얼룩졌다. 난 어쩔 수 없이 잘 들어갔다고 속여 삽입을 완료했다. 구토 증상은 관으로 담즙이 빠져나오면서 멈출 수 있었다.


밤새 토한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떠나질 않는다. 점점 통증에 익숙해져 가는 와중에 터진 힘든 하루였다.



13일 차 ~ 14일 차_2023년 9월 18일 (월요일) ~ 19일 (화요일)

고통받던 담즙이 진정되고, 점점 움직임도 익숙해져 갔다. 이리저리 움직이려고 하였다.

가끔씩 병원 밖을 산책하는 것을 상상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병동 내부만 왔다 갔다 하며 걸었다.


침대마다 각자 볼 수 있는 TV가 있어 누워서 보거나, 병동 내부를 걷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정신적으로도 많이 안정이 되어, 건강의 소중함이 문득 느껴졌다.

병실 내부에서 글을 써볼까도 생각했지만, 이 역시 행동으로 옮겨지진 않았고, 퇴원 이후에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되었다.

안정이 되면서 무탈하게 지내게 되었다.



15일 차 ~ 21일 차 _2023년 9월 20일 (수요일) ~ 26일 (화요일)

죽을 먹기로 결정이 된 이후, 점심에 첫 죽이 나왔다. 완전한 미음 형태의 죽으로 예상했는데 일상 먹는 밥알이 느껴지는 죽이어서 좋았다. 몇 숟가락 먹으니 몸에 열감을 느꼈다. 힘이 조금 붙는 느낌이었다.


이후에는 죽과 간이 덜되어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었다. 몸이 지속적으로 회복되고 상처부위도 틈틈이 소독하고 실밥도 조금씩 제거했다. 명절 전에는 꼭 퇴원을 하고 싶었다. 조심스레 퇴원 이야기를 먼저 꺼냈고, 다음 주 화요일 명절 이틀 전에 퇴원을 하기로 하였다.


퇴원이 결정되고 나서는 정말 시간이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TV까지 고장 나 정말 할 게 없었으며 스마트폰이 유일한 낙이었다. 때마침 나는 솔로를 즐겨 보고 있었는데 역대급 에피소드 편이어서 정말 재밌게 보았다. 유일한 낙이었다. 여담으로 너무 재밌게 봐서 퇴원하고 계속 보려고 했지만 재밌게 보진 못했다. 이전 출연진이 강력해서 반대로 흥미가 떨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퇴원 당일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했다. 이윽고 아빠가 도착했고, 바로 수속을 밟고 퇴원했다.

21일 만에 첫 바깥공기였고, 하늘을 처음 보았다. 아직은 기력이 예전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당분간 고향집에서 보내기로 하였고,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뭔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이상으로 짧기도 길기도 한 병원에서의 21일간 기록을 마치도록 한다.



마치며

병상의 내용을 몇 번이나 남기려 했었다. 입원 중에도 글로 남기려고 하였지만, 당장 글을 쓸 여유 있는 날이 몇 안되어 미루다가 결국 퇴원 2주 후 이렇게 남기게 된다.


3주간의 일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을 만큼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름 몰래한 일탈도 있다. 물을 못 먹는 금식에 너무 스트레스받아 이온 음료를 몰래 사 먹기도 하고, 왕성한 배변 활동을 위해 약국에서 '상쾌한 변화'라는 변비약을 사서 먹기도 했다. 그만큼 먹는 것이 그리웠고,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수술을 한번 더 받겠다면 이거라도 먹어보자'라는 심정이었다. 물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지나갔다.

이후 퇴원 후의 몸상태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집에 와서 다이내믹한 좋은 회복을 기대했으나 그런 건 없었으며 10일 정도 집에서 머무르다 원래 살던 성남으로 올라왔다.


자취집으로 올라오는데 보니 고향집에서 병원까지 꽤나 거리가 있었다. 병문안 오던 부모님 생각이 났고, 운전 중에 괜스레 눈물이 났다. 거리도 모르고 무엇이 필요하다며 오라고 떼쓰던 철없는 아들이었다.

그리고 자취집으로 온 당일 날, 엄가 퇴근 후에 전화를 했다. '잘 올라갔냐며', '집에서 제대로 못해주고 보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그동안 슬픈 영화를 보고도 잘 울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울면 괜스레 더 걱정시킬까 간신히 참아내고 괜찮다며, 많이 기운을 차리고 왔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21일간의 입원 기록을 남기려 했던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이벤트였기도 했지만, 급작스럽게 찾아온 사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고, 난 그때마다 그런 것들을 무시했었다.


나와 같은 혹은 비슷한 병을 겪고 있는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나서 조금이라도 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나와 같은 상황까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다.

몸에 칼을 댄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그 자국은 평생 남게 된다. 그 일이 오기 전에 예방하고 조심할 수 있다면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누가 이 글을 보게 될진 모르겠지만, 전조 증상이 있을 때 얼른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 미련하게 나와 같이 행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병원에서 사진조차 남기기 싫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몇 장 찍어둘걸 후회된다. 잊을 수 없는 이벤트였기에 사진으로 남기고 평생을 잊지 않고 긴장하며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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