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모자 할머니의 등장
여름에 수영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 역대급으로 더위가 찾아 온 올 여름 수영장에서 운동도 하며 더위를 식히는 게 요즘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비슷한 건지 수영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수영장의 갯수가 적지 않은 동네임에도 자유 수영을 하려면 한 시간은 일찍 가서 대기해야 했다.
이렇게 수영을 즐기는 국민이라니..스포츠센터마다 사람들이 그득하다. 이렇게 열심히 생활 체육으로 수영을 하고 있어서 박태환이나 황선우같이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할 수 있는가보다.
보통 일요일에는 동네 스포츠센터가 문을 닫기 때문에 수영메이트인 남편과 나는 일요일에도 할 수 있는 수영장을 찾아 나선 수영장 원정대가 되었다. 그러던 중 가게 된 곳은 길이 50m레인에 수심2m의 수영장!!
25m 레인은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며 수영을 즐기던 나였는데..50m를 왔다갔다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으니..정체현상이었다. 갑자기 속도가 느려지는 구간이 자꾸 발생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정체를 유발하는 사람은 빨간 모자 였다. 빨간모자가 있는 곳에서 갑자기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어라..빨간 모자의 주인공은 할머니였다.
빨간모자 할머니는 젊은이도 쉽지 않은 50m레인을 한번을 쉬지 않고 계속 돌고 계셨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수영 세계에 심취해 계셨다. 수영의 모든 영법을 구사하시며(심지어 접영도) 노장의 투혼을 불사르고 계셨지만 너무 느린 속도 때문에 뒤에 가던 사람들은 계속 정체되다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 추월하기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빨간 모자 할머니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수영장에서 나만의 속도로 느긋하게 하고 싶어도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영 신경쓰여서 내 힘보다 더 많은 힘을 내어 발을 차고 팔을 돌리다 보면 힘이 빠져 마음껏 수영을 즐기지 못하곤 했다.
'할머니는 자기만의 속도로 수영하고 계시니 힘이 빠지지 않아서 저렇게 한 번을 쉬지 않으시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일견 존경심마저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것 중의 하나는 누군가의 시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 아닐까.
생각만큼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며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살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
아주 잠깐은 빨간모자 할머니가 수영장의 빌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 주변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계신 건 아닌가..잠깐 눈살을 찌뿌리기도 했지만...누구에게나 늙음의 순간이 올 것을 알기에..힘이 빠지고 내 맘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순간은 언제가는 겪어내야 하는 시기임을 알기에 빨간 모자 할머니에게 존경을 표한다. 여전히 당당한 수영인인 그녀에게..
소설 <은교>에는 늙음에 관하여 이런 문장이 나온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함과 동시에 '고령화'는 시대의 화두가 되었고 나 역시나 40대 중반이라는 나이의 고개를 넘어가면서 나의 늙어감에 대해서는 종종 생각한다.
늙음을 벌로 생각하기 보다는 이제 드디어 자유를 만끽할 시간이 오겠구나 라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노년의 장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싶다.
그동안의 책임감을 내려 놓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시간들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건강과 경제적 비용 등 고려해야 할 변수들도 많겠지만 그러한 많은 변수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