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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리 Jun 23. 2024

이혼하자마자 사랑고백받은 건에 대하여

협의이혼 확인기일 그 후

협의이혼 확인기일 전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할 말이 있는데, 네가 이혼하기 전에는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이혼절차가 끝나면 잠시 시간을 좀 내어달라 했다.


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바로 구청으로 가서 이혼 신고를 하고, 구청 앞에 있는 한 카페에 자리 잡았다.


"잘.. 지냈어? 회사는 어때 다닐만해?"


"뭐 나랑 신변잡기 나누자고? 그냥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그는 무언가 감성적인 대화를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난 정말 할 말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하긴 했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건 정말 진심이야. 사랑해..."


"뭐???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웃겼다.

조용했던 카페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혼자 한참을 깔깔 웃었다. 어찌나 웃기던지. ㅋㅋㅋ

우리 방금 이혼접수하고 나왔는데 그 앞에서 사랑고백이라니ㅋㅋㅋ


"야 너 무슨 혼자 드라마 찍냐?ㅋㅋㅋ 사랑한다고?ㅋㅋㅋ

그거 사랑 아니야 니 착각이야. 네가 진짜 날 사랑했으면 나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니? 그리고 난 너 이제 안사랑해. 안타깝게도 내 사랑은 네가 나 배신하고 내 뒤통수 후려친 그 순간에 다 사라졌어^^"


맨날 울던 내가 하나도 울지 않고 깔깔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하자 그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고백공격이 통하지 않자 그는 머뭇거리며 선물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주고 싶어서 준비했어. 말로 하면 다 못할 것 같아서 편지도 썼어. 꼭 읽어봐 줘."


그는 별거가 시작된 이후에 종종 여러 가지 선물을 집 앞에 두고 갔었다.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 충전된 스타벅스 카드, 아기 옷, 아기 장난감, 각종 과일 등등...

내가 사과하고 싶으면 돈으로 하라고 화를 낸 후에는 가끔 5만 원에서 10만 원 정도가 들어있는 돈봉투도 있었다.ㅋㅋㅋ


이번에도 그런 종류의 선물이겠거니 하며 받아 들었다.

선물상자 크기가 꽤 컸기 때문에 혹시 그가 나한테서 빌려갔던 돈을 현금으로 갚는 건가 하는 기대도 있었다.

(난 그한테서 받아야 할 돈이 3천만 원 정도 있다. 내 돈 갚아라 이 새끼야)


그 상자를 받아 들면서 그에게 나름 충고도 했다.


"너 지금 빚이 몇억이야 도대체. 돈 그만 좀 쓰고 이제 정신 차리고 아끼면서 살아. 양육비 보내고 너 대출이자 내고 나면 남는 돈도 없잖아. 그 빚은 다 갚아야 할 거 아냐. 나한테는 좋은 남편 못했지만 우리 딸한테는 좋은 아빠 해야지. 나 간다."




집에 오는 길에 그에게서 받았던 선물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날 울리는 데 성공했다.


너무 열받아서 눈물이 줄줄 나왔다.


선물상자 뚜껑에는

Our memory last forever 어쩌고 하는 개소리가 써져 있었고, 그 안에는 그가 말했던 7장에 달하는 지와, 우리가 지난 10년간 같이 찍었던 사진들 한가득, 그리고 우리 이름이 함께 나와있는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가 들어있었다.


이전에 그가 잘못했을 때 잘 먹혔던 방법을 또 쓰는 거다.

나의 감성과 동정심을 자극하고 추억을 소환해서 그에게 돌아가도록.


' 아, 얘는 내가 만만하구나. 아직도 겨우 이딴 걸로 내가 지를 또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얜 하나도 안 변했구나. 내가 이전에 그가 변하길 바라며 여러 번 기회를 줬던 건 다 헛짓거리였구나.

나한테 이런 짓거리들을 하고 어떻게 감히, 나와 계속 함께 하는 삶을 바랄 수 있나?

이 인간은 염치라곤 없구나.

나한테 별로 미안하지 않구나.' 


너무너무 화가 나서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운전하는 아버지 옆자리에 앉아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가 준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소리 지르며 욕하며. 상자까지 전부.

속이 활활 불타는 것 같아 냉면도 시켜 먹었다.




그렇게, 그와 나의 10년이 완전히 끝났다.

냉면처럼 시원하게 말아먹은 내 결혼이 드디어 끝이 났다.


끝.



제가 그동안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모두 쓴 것 같습니다.

읽고, 이킷 눌러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달아주신 댓글엔 모두 대댓글을 달아드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글을 쓰는 것보다 대댓글을 다는 것이 훨씬 어렵더라고요. 썼다 지웠다를 한참 하다가 결국 달지 못한 대댓글이 수두룩합니다.

모두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였습니다.

이렇게나마 대댓글을 답니다. 언젠간 직접 댓글로 가서 남기도록 할게요.


또 쓰고 싶어지는 이야기가 생기면 간간히 돌아오겠습니다.


당분간은 자격증 공부에 집중하느라 글이 좀 뜸해질 것 같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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