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렸다. 빈 들깨 밭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땅안개가 쫘악 깔리면 멋스럽겠으나 뜨끈한 소똥 위로 몽글몽글 김 올라오는 느낌이다. 봄에 퇴비를 많이도 뿌리더니 땅 속에 섞인 소똥의 알 수 없는 작용으로 김이 올라오는 건 아닐까? 소의 방귀? 메탄가스? 아침이 구리구리하다. 지난번 바람 없던 날엔 누군가가 땐 나무 연기가 자욱하니 깔리더니만, 나는 땅안개가 보고 싶다고요.
날이 추우니 핸드폰이 눈사람 사진을 보여준다. 차량용 거치대에 올리니 알아서 추억을 보여주는 똑똑한 핸드폰 세상이다. 복실이가 복실복실한 모자를 쓰고 눈사람 눈을 붙이고 있다. 지난겨울에는 눈이 많이도 왔다.
“얘들아 작년에 눈 온 거 생각나? 올해는 눈 많이 안 오면 좋겠다. 그럼 또 눈삽운동 열심히 해야 하잖아. ”
“괜찮아 우리가 다 치워줄게. ”
치워주기는 옆에서 썰매를 타고 눈싸움이나 하겠지. 달복이는 바로 눈싸움에 들어간다.
”복실아 눈싸움 하자. “
금방 복실이가 이겼나 보다.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달복이는 하지 말자고 한다. 햇빛 때문에 자신이 불리하단다.
”오빠가 먼저 하자고 했으면서! 나도 안 해! ”
아침부터 기분도 안 좋은데 싸움을 건다. 눈싸움을 걸어서 응해줬더니 이제는 햇빛 탓을 하며 속을 긁는다.
“엄마 복실이 사춘기인가 봐. 감정이 오락가락해. “
복실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춘기 같았다. 아기 때부터 잠투정이 유난히 심했다. 아침은 늘 감정이 오락가락한다. 특히 아침은 더욱 그렇다. 늘 저조한 아침이지만 오늘은 더 그랬다.
앞 머리가 이상하다고 했다. 뻗쳤다. 아침엔 동여매고 가면 그만인 찰랑이는 머리가 오늘따라 옆 이마에 딱 달라붙었다. ‘어제 안 씻고 자서 그렇잖아. ’ 엄마가 보기에는 멀쩡하다. 급기야 복실이는 머리가 이상해 학교에 못 가겠다고 했다. 중학생 어린이 둘이야 머리에 물을 묻히고 드라이하는 게 일상이지만 복실이가 머리 가지고 아침에 이러는 건 처음이다. 정말 사춘기가 오는 건가? 아침 설거지를 하다 말고 복실이의 앞 머리에 물을 듬뿍 발라줬다. 그리고 수건을 머리에 얹어 주었다.
“엄마 설거지 마저 하는 동안 드라이 해. ”
얼굴 아래쪽에 드라이기를 대고 말린다. 앞 머리가 위와 양 옆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또 위로 뻗치기 전에 얼른 달려가 아이의 앞 머리를 말려주었다. 친절한 엄마는 말씀하셨다.
”예뻐지려면 부지런해야 해. 화장하고 머리도 예쁘게 하고 단장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 머리가 눌리는 게 싫으면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머리를 감아야 해. “
느끼는 바가 있을까? 그저 아침이 귀찮고 싫을 뿐일까?
‘복실아 머리를 자르자. 응? ‘
꿋꿋한 복실이는 긴 머리를 좋아한다. 심지어 풀고 다니는 게 예쁜 줄 안다. 학원 선생님이 푸니까 예쁘다고 했단다.
달복이의 머리는 늘 떴다 떴다 비행기다. 형들처럼 머리단장 좀 하라고 해도 괜찮단다. 달복아 너도 곧 형들처럼 외모에 신경 쓰는 날이 올 거야. 사춘기가 오면 그렇더라. 형들도 어릴 땐 다들 신경도 안 썼어. 자신은 외모보다 게임에 신경을 쓸 것 같다고 한다. 정말? 어디 나중에 보자.
“엄마 그런데 복실이는 왜 사춘기도 아닌데 외모에 신경을 써? ”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모에 신경을 써. 아마 죽는 날까지 외모에 신경 쓸걸? 복실이는 여자니까. ”
“복실이가 여자야? ”
“여자 맞아. ”
오빠 보다 덩치가 커지고 있는 여자인 동생. 복실이는 달복이에게는 지켜줘야 하는 여동생에서 이제는 넘어야 할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 줄줄이 위로 오빠 셋 틈바구니에서 자라 치마라도 입으면 생소한 사건이 되는 우리 집 막내 복실이는 여자랍니다. 복실아 제발 오빠 좀 때리지 마. 사춘기 소녀 복실아 씩씩하게도 좋지만 목소리 좀 작게 아름답게 예쁘게 사랑스럽게 응?
어느 날 고모의 롱원피스를 빌려 입은 복실이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했다.
“복실아 이렇게 입으니까 정말 여자 같다! ”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몰랐다. 그냥 예쁘다고 한 말이었는데 옆에 있던 가족들이 마구 웃어댔다.
“복실아 평소에 엄마가 너를 남자로 생각하나 봐. 하하하하하! ”
복실이는 복슬복슬 모자가 달린 하얀 털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아직은 귀여운 옷을 좋아한다. 그런데 바지는 편하디 편한 것을 좋아한다. 바지 솔기가 거슬리거나 상표가 붙어 있어 거슬리거나 딱 달라붙어 거슬리거나 허리가 쪼여 거슬리는 바지는 오늘 아침에도 모두 퇴짜를 맞았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겨울 바지를 줄줄이 꺼내 입어보고 다섯 번째 바지를 입고 갔다. 소녀의 사춘기기가 정말 시작된 것일까. 소녀의 헐렁한 바지를 주문해야겠다. 소녀는 무럭무럭 자란다. 맞는 겨울 바지가 하나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