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사의 의무를 다했다.
기사는 달린다. 앞을 향해 달린다. 가끔 주차를 할 때만 뒤로 달린다. 기사는 평소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달린다고 생각했다. 운전대를 잡았으니 기사의 손과 발로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기사의 손과 발을 움직이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매일 누구의 의지로 달리는지 알 수 없으나 오늘은 누구의 의지로 달리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힘차게 달린다. 운전자의 의지는 없다. 고삐를 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명령을 하달받은 기사는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을 뿐이다. 눈을 좌우로 돌릴 틈이 없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시간 안에 당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각을 면하라!
오늘의 미션이다.
운전기사는 달리는 말과 같다. 기사는 기수가 아니다. 기사는 말이다. 기수는 복이다. 8시 50분까지 교실에 들어가야 하는 기수는 어서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달리라고 한다. 주황불에도 서지 말고 달리라고 한다. 앞서 가는 느린 차에게 화를 내주는 것도 기수다. 기수는 말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박차를 가한다. 말은 평소 산과 들과 하늘을 즐기며 유유자적한다. 앞만 보며 갈 수가 있나. 가을 풍경을 감상하며 전후좌우 360도를 살핀다. 오늘은 차에 백미러 룸미러도 있으니 평소 말보다도 더 좋은 시야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눈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린다. 기수가 눈가리개를 해 주었다. 앞만 보고 달리란다. 목표를 향해 달리려면 한눈팔면 안 된다. 기수는 이제 채찍질을 해댄다.
지각은 면했다. 느릿한 선비 걸음을 즐기던 복이는 5분을 남겨두고 교문을 통과했다. 복이가 바람과 같이 달려간다. 긴 다리를 쫙쫙 벌리며 뛴다. 우리 집에서 가장 긴 다리를 자랑하는 복이의 다리가 부럽다. 늘 흐느적거리던 그 다리가 쌩쌩 달리는 걸 목격했다. 다음부턴 늦게 준비를 하면 뛰어 오라고 해야겠다. 잘 뛰네.
기사의 숙명은 달리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달리는 것인가? 누구를 싣고 달리는 것인가? 어느 누구의 의지로 달리는 것인가? 그저 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물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