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세요?
설 연휴 중 한 날이었다. 우리 시어머니댁에서 시어머니 자매 내외 분들이 모두 모이셨다. 남편에겐 큰 이모부부, 작은 이모부부, 외삼촌께서 온 셈인 것이다. 멀리서 손님이 오신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애플망고 한 박스를 준비해서 선물로 가져다 드렸다.
큰 이모부와 작은 이모부께선 술을 매우 좋아하셨고 조카내외인 우리 부부도 어머님댁 거실상에서 함께 자리를 했다. 외삼촌께선 애플망고가 너무 맛있다며 칭찬을 하셨고, 나는 ㅇㅇ(남편 이름)가 어른들 오신다고 꼭 챙기라고 했어요. ^^ 하고 내 나름대로 아주 예쁘게 대답했다.
사건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경상도 출신인 작은 이모부께서는 어른들 앞에선 남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며 ㅇㅇ씨 또는 여보, 그리고 ㅁㅁ(아기이름)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박정희의 와이프 육영수는, 남편에게 여보라는 말조차 감히 못 했다며, 그 시절 이야기를 계속해서 했다.
약 80에 가까운 큰 이모부는 본인의 어머님은 아버님보다 2살 연상임에도 꼬박 존댓말을 썼다고 계속 설명을 하며, 그건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다.
체감적으로 두 분 합쳐 40분은 넘게 잔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 자리에 유순한 내 남편은 열심히 항변을 했다. 그럼 이모부들부터 시범을 보여주세요. 이모한테 여보라고 해보세요. 민망하다고요? 이모부 따님은 남편을 뭐라고 부르나요? 오빠라고요?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남편과 달리 유순하지 않은 나의 표정은 점점 티 나게 썩어갔고, 나는 분노로 몸을 바르르 떨며 참다 말했다. 점잖은 우리 시어머니의 체면을 생각하여 간신히 예의를 갖춰서.
제가 ㅇㅇ랑 합의해서 알아서 잘할게요.
근데 작은 이모부는 왜 제 남편보고 인마라고 하세요?(이 말을 듣고 작은 이모부는 맞네.. 하고 머쓱해했다. )
시어머니 체면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회사에서 이런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면, 책상을 내리치며 제가 왜 그래야 하죠? 하고 끊임없이 따졌을 텐데. 녹음하고 조직문화팀에 바로 찔렀을 텐데. 내가 내 남편의 아내라는 이유로 저런 말을 대체 왜 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나는 애플망고까지 챙겼는데 되려 욕을 먹은 셈이다. 남편의 이름을 불렀단 이유로.
심지어 임신 11주 차에 접어드는 나에게 둘째, 셋째를 이야기하는데 정말 불쾌했다. 그 상황에서도 난 꾹 참고 무표정으로 말했다. " 저 이제 겨우 임신 11주 차인데요."
10시가 되자 남편은 잘 시간이라며 일어섰고 사건은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다. 어른들에게 표정을 구기고, 말대꾸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그런데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사람이면 기분이 나빠도 무조건 참아야 하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기분 나쁜 말을 했다면, 기분 나쁜 티를 충분히 내야 그들도 어린 사람도 기분이 나쁠 수 있구나 눈치채고 알아차릴 것이다. 다음부터는 조심할 것이다.
어른이 말하는데 대충 맞춰줄 수 있지 않나?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난 잘못된 구시대적 문화에 날 끼워 맞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발 물러서면, 두발 물러서길 바라는 게 거친 이 세상, 이 사회다.
만약 누군가가 네 부모가 너를 이렇게 키운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자기 의견을 똑 부러지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말끝을 흐리거나 우물쭈물하면 똑 부러지게 다시 말하라고 엄히 교육받았다. ) 물어보는 상대방에 따라, 당신은 네 자식을 불합리한 상황에 순응하라고 가르치나요?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앞으로도 남편의 이름을 안부를 생각은 없다. 불러라고 지어놓고, 아내인 나는 왜 못 부르는가?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인 H군이 이모부 앞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른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그럼 난 남편의 친구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인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그런 돼도 안 한 문화에 날 맞출 생각은 없다.
난 나의 자존과 인격을 강하게 지킬 것이다.
(그리고 이 날 있었던 일은 태교에도 아주 도움 될 거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