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어제는 피곤해서 방을 제대로 구경 못했는데, 오늘은 이것 저것 눈에 보인다. 천장은 삼각형 구조다. 하늘색 슬라이드에 서까래도 붙이고, 침대 윗 부분에 러그 장식까지 하다니. 오른쪽 창 너머에는 텃밭이, 왼쪽에는 귤밭이 보인다. 풍경을 보면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 잠들어 있던 오감이 살아났다. 옆 건물에 사는 사장님도 나랑 똑같은 뷰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겠지? 어쩐지 사장님 집에 놀러온 기분이다. 참, 좋다.
그나저나 점심 뭐 먹지. 요리해서 먹어도 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요리도 잘 못 한다. 햇반, 김, 참치나 사다 먹어야지. 다행히 200미터 떨어진 곳에 슈퍼가 있다. 양손 가득히 집어담고 있는데, 할아버지 사장님이 중얼중얼거린다.
“어제보다 눈이 더 펑펑 내리네.”
커다란 눈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서 어디서부터 내리고 있는지 보려고 했지만, 시작점이 보일리 없다. 대신 눈송이가 조용히 내 눈꺼풀 위에 쌓인다. 이건 하늘이 보내준 선물인가. 혀를 내밀어서 살짝 먹어 보기도 했다. 간간이 트럭이 지나 다녔지만, 이 거리에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렇게 낭만적인 날도 다 있구나. 이 모든 게 영화 같았다. 내 뒷모습을 찍는다면 새하얀 세상 정중앙에 인간 눈사람이 서 있는 커트는 딸 수 있을텐데. 러브레터 명장면이 생각났다. 내가 그 순간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니, 꿈이야 생시야.
그런데 폰이 방전되어 버렸다. 하필이면 왜 오늘이야. 하지만 지나간 일을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다. 온 길 그대로 걸어가는 수밖에. 아뿔싸, 타시텔레 표지판이 사라졌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있는데… 비슷한 지점에서 헤맨지 30분째, 이렇게 해서는 오늘 내로 숙소에 갈 수 없겠다. 다행히 누군가 한옥 마당에서 담배를 피는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돌담 위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 “힐링농원이 어딘지 아시나요?” 난닝구만 입고 있는데 일면식도 없는 여자가 말을 건넸으니 놀랄 법도 했지만, 그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알려준 대로 터벅터벅 걸었다. 익숙한 길이 보이니까 정신이 좀 든다. 운동화가 반 즈음 젖은 것도 이제 알았다. 돌아오자 마자 전기장판에 라디에이터를 풀 파워로 틀었다. 그렇게 눈을 잔뜩 맞았는데도, 또 다시 창밖으로 시선이 간다. 밖에서 눈을 맞는 것과 안에서 보는 건 완전히 달랐다. 움직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셈이었다. 창틀이 자연을 담은 액자라면, 내 방은 그 액자를 가장 멋지게 걸어 둔 갤러리였다. 겨울이 가장 싫은 계절이었는데, 이제야 그 진가를 알 것도 같다.
감상에 취해가는 사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이었다. 오늘처럼 눈이 가득 쌓인 날에도 가죽 부츠를 신다니, 패션에 죽고 못 사는 분이 틀림이 없다.
“먹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이것 저것 비상 식량을 가져와 봤어요. 짜파게티, 과자, 우리 농원에서 바로 딴 귤 몇 개. 우리도 지금 마트 못 가”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안 그래도 뭐 먹나 걱정했어요. 다른 게스트는 어떻게 지내고 있대요?”
“정은씨 한 명밖에 없는데?”
타시텔레에서는 밤새 별빛을 보면서 이 손님 저 손님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 나눈다는 후기를 본 것 같은데, 나 혼자 머물고 있다니. 게스트하우스 다 접고 지금 짓는 펜션만 운영할 예정이라서 최대한 손님을 받지 않았단다. 당황스럽다.
“그런데 방 열쇠 따로 못 받은 것 같은데, 받을 수 있나요?”
“아, 잃어버렸어. 내가 지켜줄게. 걱정마”
“네”
열쇠 못 받은 게 이상한 상황이 맞는데, 말 꺼낸 나만 괜히 머쓱해 졌다. 이 곳에서는 사장님 말마따나 없이 살아도 괜찮겠다. 그동안 없어도 되는데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