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엔 항상 네가 서 있었다-14
숨구멍 하나 없던 빼곡한 열기에 구멍을 뚫는다. 보일 듯 말듯한 틈 사이로 새 계절이 들어온다. 넉넉하고 털털한 웃음 따라 그들이 온다.
바람은 지휘자, 풀벌레는 오케스트라 악단. 시월 정기연주회가 시작됐다. 악보도 악기도 없지만 관중석은 언제나 만석이다. 연주가 클라이맥스를 지나면 덩달아 가을도 절정을 향해 간다. 바야흐로 달빛이 노릇하게 익어가는 시월이다.
1도씩 떨어지는 기온만큼 마음온도도 뚝뚝 떨어진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을 꿀 때처럼 마음도 덩달아 쿵 내려앉는다. 성장기 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 다지만 오래전 성장이 멈춘 어른은 왜 떨어지는 꿈을 꾸는 걸까. 한창때 자라지 못한 마음이 이제라도 커지려는 걸까.
동글동글
자알 익은
가을햇살
할머니 웃음을 닮아
바람, 나무, 풀잎 하나에도
안부를 묻는다
금빛향연 사이로 퍼지는
푸근한 웃음소리
무뚝뚝한 바람도
포옥 안아주는
잘 익은 햇살 한 줌
가을걸음이 쌓일수록 심신이 가벼워진다. 걸을 때마다 생각을 하나씩 떨군다. 지나온 길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지나가던 개미가, 소풍 나온 새가 주워가더라도 개념치 말라며 걸음을 재촉한다.
엉킨 잎사귀, 덥수룩한 풀,
양팔 가득한 열매를
톡
톡
톡
세상을 빗질하는
가을 빗줄기
오소소 이슬 돋은 잎맥
가지런해진 나무의 치아
촘촘한 빗질이 지나가면
얽힌 날은 쫙쫙
설킨 날은 술술
보름달도 쉬어간 한가위인데
가을 빗질은 멈출 줄도 모르고
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봄의 기다림만 무성하게 자랐다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는데 또 잠이 밀려온다. 눈꺼풀 위로 떨어지는 기습공격. 밀물과 썰물의 줄다리기 속, 어둠이 내려앉는다.
밤으로 까맣게 칠하고 별빛으로 스크래치 하면 노란 달빛이 드러난다. 귀뚜라미가 독주의 시작을 알리면 밤공기가 가을을 데리고 온다. 못 이기는 척 새침한 표정으로 앉는 가을님. 눈이 감긴 지도, 잠든 지도 모르는 사이, 시월은 계절의 중심을 지나고 있다.
비어있다 생각한 순간도 사실은 누군가의 따뜻한 품 속이었는지 모른다. 온기인지도 모르고 철없이 굴던 날도 낙엽 따라 바래진다. 겨울 한복판이라 생각했던 계절이 사실은 봄의 시작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