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엔 항상 네가 서 있었다-15
어스름한 창밖은 우윳빛 안개에 싸여 있다. 숨 가쁘게 이어지던 일주일의 피로가 지층처럼 쌓였다. 거대한 잠이 장막을 쳤다. 부드러운 빛깔과 달리 막은 견고하다. 새 한 마리만 깨어나 새벽을 부지런히 부리로 쪼고 있다. 기다림에 지친 햇살이 간지럼을 태우자 못 이기는 척 꿈틀거리는 아침이다.
누군가는
꿈이 낙엽 같다 하지만
바스락거리는 건
가뿐해지기 위해서야
남은 한 방울까지 비우고
어느 날
비가 내리면
다시 숲으로
저 넓은 바다로
헤엄칠 거야
말라버린 몸피는
생기로 부풀어
초록 가득한 그날로
돌아갈 거야
작은 잎사귀에는
여름내 모아둔
바람, 구름, 흙내음이 가득해
푸른 볕에 도르르
잘 익은 꿈은 갈색
투명한 물을 온통
꿈으로 칠할 거야
뜨겁고 간절한 계절은
바로 지금이니까
조그만 찻잎은 한 우주를 채울 만큼 위대하다. 겉모습 중요하지 않다. 어떤 꿈과 에너지로 채우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가진 에너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누군가에게는 닿는다.
보이차가 내미는 에너지는 뜨거운 햇살, 바람, 비, 흙의 기운이다. 동그란 찻잔 안에 인내한 시간이 살아난다. 자연의 선물을 받을 자격은 누구라도 충분하다.
물은 찻잎의 타임머신
초록나무였던 때로
무성한 숲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보드라운 지느러미가
물결을 쓰다듬으면
설핏 기우는 해
지난 계절이 그리워
물속으로 뛰어들면
어느새 닿은 고향하늘엔
갈색노을이 물들었다
뜨거움에 몸서리치던 잎사귀도 고요해졌다. 본연의 빛깔만 찻잔에 남았다. 마음을 휘젓던 불순물도 언젠가는 가라앉는다. 순정한 마음만 남아 온몸을 채울 것이다. 뜨거움과 소란은 지나간다. 온기와 침묵으로 가득한 시간이 오고 있다.
안으로 흘러온 언어는 몸 안을 부유하다 어느 날 적절한 때에 밖으로 흘러나온다. 나의 말이기도 하고 너의 말이기도 하다. 때에 맞춰 나타나기도 하지만 계절과 맞지 않고 더러 상황에 어긋난 옷차림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설익은 욕망으로 채운 언어는 내가 되기도 하고 과거로 잊히기도 한다.
불안과 두려움은 좁은 틈으로 들어온 바람과 같다. 보이지 않는 틈이라도 기어코 비집고 들어와 마음을 얼린다. 일어날 힘도 없이 물음표만 곧추세우다 그마저도 눕히고 잠들었다.
어제는 낙방하고 오늘은 다시 쓰는 아침, 좌절이든 성취든 반복하다 보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마음에도 근력이 생기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