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너 참 예쁘다- 17
가을은 깊어가는데 퐁당 뛰어들지도 못한다. 창밖에서 하늘만 보고 발만 동동 구른다. 가을에도 땀은 흐르고 겨울에도 햇살은 비친다. 갖지 못한 계절을 그려 주머니에 넣는다. 가을 안에 여름이, 겨울 안에 봄이 자꾸만 비집고 나온다. 굵직한 더위도 기나긴 겨울도 견딜 수 있는 건 간혹 비치는 지난 햇살 때문이다. 삶 위에 뿌려진 양념처럼 아침 위로 11월 햇살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그리움의 나이와 키를 재어본 적 있던가
그리움은 자라기만 하고
늙지도 죽지도 않더라
하늘에 닿을 듯
올려다보는
땅에 닿을 듯
내려다보는
늙지도 않는 청신한 얼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안아도
여태껏
그리움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온기가 반가운 계절이 왔다. 난로, 전기장판, 두툼한 이불, 서로의 체온. 추위는 두렵지만 몸을 덥혀줄 온기가 곳곳에 남아있다.
냉기를 피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이 가득한 공간에 들어서면 심장이 먼저 알아챈다. 내 안의 수줍은 아이가 책숲사이를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심장이 뛰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뜨거운 증거.
축제가 끝나고 시와 글은 남았다. 하루를 안은채 새벽 속에 앉았다. 내리막길로 들어선 기온이 눈에 띈다. 방지턱처럼 턱턱 걸리는 삶의 조사를 빼본다. 걷다가 멈추다가 바라본 밤하늘엔 그림 같은 달이 걸려있다. 지친 하루 끝에 걸어놓은 쉼표였다가 어느 날에는 둥근 마침표로 찍혀있었다.
가을마지막 밤, 화려한 조명 사이 수많은 눈빛이 별빛으로 쏟아졌다. 땀방울로 가득 찬 10월이 가고 기다란 11월이 왔다. 빨강리본을 둘렀던 시월과 달리 십일월은 까만 개미행렬로 가득하다. 알찬 곡식같이 들어찬 하루가 빼곡하다. 빨강선물이든 검정선물이든 건네받은 하루는 감사로써 충만하다.
냄비에 겨울을 넣고 끓이면
맛있게 익어가는 하얀 눈
알맞게 익으면
지르는 뽀얀 비명
뜨끈한 국 한 그릇이면
어떤 추위도 두렵지 않아
무뚝뚝한 겨울과
따뜻한 한 끼로 나눈
우리의 첫 눈맞춤
설탕은 당신이 먹었는데 달달함은 나에게 묻었다. 투명하고 작은 입자가 까끌하다. 달콤한 행복은 말랑하고 폭신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까칠하기까지 하다. 직접 맛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행복이라면 그대가 달달함에 젖었을 때 전해지는 기쁨,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거실 온도가 1도 또 내려갔다. 겨울에 다가설수록 달력은 얄팍해진다. 겨울이 두툼해질수록 온도는 얇아진다. 가뿐해진 온도를 볼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그러나 겨울까지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