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너 참 예쁘다-16
살갗에 닿은 공기는 가을이고 가을이 온 지도 모르고 내리쬐는 햇볕은 낡은 티셔츠를 입은 여름이다. 낮의 열기도 독기가 빠져 느슨하게 대지를 비춘다. 옅은 볕에 기대서라도 여름을 놓지 못하는 봉숭아. 미련한 잎사귀에도 구멍이 뚫렸다. 몇몇은 달을 건너지 못하고 손에 꼽을 만큼 진분홍 꽃송이만 깃발처럼 나부낀다.
서늘한 산책길을 금목서가 따라나섰다. 이름과 얼굴을 알지 못했을 땐 평범한 나무에 불과했다. 향기의 주인공이 금목서라는 걸 알고선 단박에 알아보았다. 많은 나무 중에서도 용케 알아본다. 신기한 일이다. 흐릿한 형체만 보아도 걸음걸이만 보아도 향기만으로도 너를 알아본다는 건.
물려줄 게 없어서
외로움을 남긴 사람
세상 날 때 가벼웠는데
물려받은 게 너무 많아
뚫린 심장 사이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바람이 지나간다
그리움이 넘치면
겨울이 오나 봐
긴 하루 끝에
눈밭에 가득한
잡히지 않는 그리움
햇살아래서
지워본다
질긴 그림자를 지워본다
바닥에 툭 떨어진 어제도, 데구루루 구르는 오늘도, 멀찍이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내일도 멈춰 세운다. 아무도 일으키지 못한 하루를 귤빛나무가 일으킨다. 토닥이지 않아도 손잡지 않아도 자꾸만 마음에 날개가 돋는다. 꽃나무가 전하려던 마음은 그리움이 아니라 '다시'라는 간절함이었나 보다.
밥솥에 밥이 있어도
"아이고 우리 강아지 배곯을라"
뽀얀 쌀밥을 다시 짓는 울 할머니
깨끗한 양말을 신어도
"아이고 내 새끼 발 시릴라"
말간 새양말을 꺼내는 울 할머니
말쑥한 이불이 있어도
"아이고 우리 토끼 추울라"
뽀송한 새 이불을 펼치는 울 할머니
새것만 주고 싶은가
좋은 건 다 내어주고
하얗게 비어 가는 울 할머니
잠이 온다. 늙지도 않는 잠. 몸이 늙으면 잠도 늙을까. 빗방울이 메타세쿼이아 잎사귀 끝에 매달렸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남은 힘을 손끝에 모은다. 투명한 방울은 연약하지만은 않다. 무색무취, 떨어지면 흩어질 흔적조차 사라질 물방울이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매달린다. 이별이 아쉬운 걸까. 소멸이 두려운 걸까. 영롱한 방울방울이 땀방울같이 열렸다. 무심한 듯 햇볕이 다가와 눈물을 닦아준다. 온몸에 힘을 빼고 따뜻한 손을 잡는다. 지친 잎사귀뿐인 줄 알았던 공원 산책로에 아직도 꽃이 남아있다. 지는 꽃 피는 꽃 따라 걸어가 볼 만하다. 피어날 꽃이 있고 알아야 할 이름이 있으니 아직은 살아가볼 만하다.
이별과 새로운 시작은 늘 몸과 마음을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이별에 취약한 사람에게 나무가 주려던 건 남은 계절을 견뎌낼 힘이었나 보다.
* 결실과 수확의 계절을 맞아 안팎을 정신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과실수확, 가을공연 등으로 글방방문이 다소 뜸해질 수 있습니다. 마무리되는 대로 너무 늦지 않게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한 가을날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