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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23. 2024

5. 상거일이원 의대일이완

  - 〈고시십구수〉의 제1수 / 그대 기운 내서 잘 지내야 해요

5. 그대 기운 내서 잘 지내야 해요 / 相去日已遠(상거일이원) 衣帶日已緩(의대일이완)(〈古詩十九首(고시십구수)〉의 제1수)

   여기서부터는 특별히 시적 화자와 그대(君) 가운데서 과연 누가 남쪽에 있고, 누가 북쪽에 있는지를 가리고자 하는 눈으로 살펴본다면 이 시의 내용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 더욱 재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배울 때 교수님께서는 한시 강독 시간에 특정 한시 작품을 가르치시면서 늘 그 작품과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들, 곧 작자나 시대 배경이나 작시(作詩)의 동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 한시의 주제 따위에 대한 설명까지 먼저 하시고 난 다음 비로소 해당 한시를 해석하고 번역하는 순서를 밟아가시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강의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그 한시 작품에 대한 흥미가 거의 예외 없이 반감되었던 탓입니다. 실은 교수님만이 아니라, 누가 강의를 해도 대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예습을 전제로 한 교수방식이라고 헤아리는 게 맞을 것 같기는 합니다. 학생이 해당 한시를 충분히 예습해 왔다면 그런 순서로 강의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한 편의 시를 처음 읽는 독자로서는 사정이 역시 다르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현대 시인들의 시집을 읽을 때 시 한 편 한 편을 그에 얽힌 여러 가지 정보들을 사전에 찾아보고 숙지한 상태에서 읽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식의 시 읽기는 오히려 그 시에 대한 나만의 감상을 방해하는 일이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저는 심지어 시집 뒤에 붙은 평론가의 해설도 이런 점에서는 상당한 방해 요소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시 자체가 워낙 난해하여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되도록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만의 감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집을 읽는 목적이 수능 시험에서처럼 무슨 정답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한시도 시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선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한번 읽어보는 과정을 먼저 거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시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그러한 것처럼, 배경 정보의 양이 워낙 많고, 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저도 그것을 애써 찾아내어 공부하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번 시구는 ‘相去日已遠(상거일이원) 衣帶日已緩(의대일이완)’입니다.

   끊어 읽기는 ‘상거/일/이원 의대/일/이완’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다.

   의미는 어렵지 않은데, 번역이 좀 까다롭습니다.

   맨 앞의 ‘相去(상거)’부터가 그렇습니다.

   ‘서로 상(相)’자는 이 시의 시적 화자와 그대(君)를 함께 가리킴이 분명하니 문제 될 게 없지만, ‘갈 거(去)’자의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이 글자는 명사로는 ‘거리(距離)’라는 뜻이기도 하고, 동사로는 ‘떨어지다(落(락)이 아니라, 離(리))’라는 뜻도 되니까요. 그래서 ‘相去(상거)’는 ‘서로의 거리’라고 할 수도 있고, ‘서로 떨어지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의 ‘날·해 일(日)’자는 한문 문장이나 시구(詩句)에서 부사로 ‘날마다’나 ‘나날이’라고 새겨야 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여기서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우선, 이 ‘日(일)’자를 명사로 ‘날’이나 ‘해’로 보면, ‘相去(상거)’와 붙여서 ‘서로 떨어진 날(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날’을 복수로 ‘날들’이라고 하면 조금 더 구체적인 느낌이 나겠지요.

   다음은 ‘이미 이(已)’자입니다. 이 글자는 동사로는 ‘말다’나 ‘그치다’, 부사로는 ‘너무’, ‘매우’, ‘지나치게’, ‘대단히’ 따위 다양한 쓰임새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은 ‘멀 원(遠)’자인데, 이 글자도 더러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오래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글자라서 역시 의미 선택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컨대, ‘遠世(원세)’라고 하면 ‘긴 세월’이나 ‘오랜 세월’의 뜻이 되니까요.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이제 ‘相去日已遠(상거일이원)’ 전체를 번역해보면, 우선은 이런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

   ‘서로 떨어진 날(해)이 이미(너무) 오래되었다.’

   또는, 이렇게도 할 수 있겠지요.

   ‘서로의 거리가 나날이 너무 멀어진다.’

   여기서 ‘나날이 너무’를 조금 의역해서 ‘점점 더’라고 해도 뜻이 통합니다. 그럼 이렇게 되겠네요.

   ‘서로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갈 거(去)’자를 명사로 볼 것이냐, 동사로 볼 것이냐가 번역의 열쇠가 되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번역하는 분의 견해나 취향대로 선택하면 될 텐데, 저는 ‘날’을 복수로 ‘날들’이라고 하여 ‘서로 떨어진 날들이 너무 오래되다’라는 정도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뒤의 구는 번역보다는 표현이 퍽 재미있으면서도 거기에 담긴 의미가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저미는 탓에 주목할 만합니다.

   우선 ‘衣帶(의대)’입니다.

   ‘옷 의(衣)’자와 ‘띠 대(帶)’자니까 그대로 풀이하면 ‘옷과 띠’ 또는 ‘옷의 띠’가 됩니다. ‘옷과 띠’는 ‘옷차림’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어서, 이 경우에는 ‘衣帶(의대)’를 그대로 그냥 ‘의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드물지만, 실제로 지금도 ‘의대’라는 말이 더러 쓰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옷의 띠’란 곧 ‘허리띠’를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衣帶(의대)’는 대개 ‘허리띠’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허리띠와는 그 재질이나 모양새가 다르겠지만, 기능은 같을 것입니다.

   ‘날·해 일(日)’자와 ‘이미 이(已)’자는 앞에서처럼 여러 가지 뜻 가운데서 적절하게 골라 번역하면 되겠습니다.

   남은 것은 ‘느릴 완(緩)’자입니다.

   이 글자는 ‘느슨하다’나 ‘늘어지다’라는 뜻으로도 쓰이니, 바로 앞의 ‘衣帶(의대)’, 곧 ‘허리띠’를 감안할 때 ‘느슨하다’의 뜻으로 보면 서로 잘 어울리겠지요. 그럼 ‘衣帶日已緩(의대일이완)’은 다음과 같은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허리띠가 날로 더욱 느슨해지다.’

   이제 앞뒤의 구를 이어서 문장을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네요.

   ‘서로 떨어진 날들이 너무 오래되어 허리띠만 날로 더욱 헐거워진다.

   저는 여기서 ‘느슨하다’를 ‘헐겁다’로 살짝 바꾸어 번역했습니다. ‘느슨하다’보다는 ‘헐겁다’가 좀 더 분명한 느낌이라서요.

   물론, 이 번역문만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얼른 와닿지 않습니다. 속뜻을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서로 떨어진 날들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것은 이 시의 시적 화자와 그대(君)가 서로 떨어져 지낸 날들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뜻이니, 당연히 두 사람은 그만큼 서로에 대한 근심 걱정과 그리움이 몹시 깊어져 있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그리움과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식욕이 있을 턱이 없지요. 따라서 두 사람은 분명히 야위어 있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야위었으니, 허리띠가 어디 맞겠습니까. 분명히 몸이 홀쭉해지면서 애초의 허리띠가 지금쯤은 꽤나 헐거워졌을 것입니다.

   나아가 근심 걱정과 그리움의 나날이 계속되면 될수록 허리띠는 점점 더 느슨해지겠지요. 지금 그들은 어쩌면 피골이 상접한, 딱한 몰골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런 뜻이지요. 참 가슴 아픈 정황 아닙니까. 그도 그럴 것이, ‘상사병(相思病)’이라는 게 왜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운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지금 시적 화자는 도대체 누구의 허리띠가 헐거워졌다고 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사람 다 그러하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인 우리의 추측일 뿐입니다.

   저는 이 시구대로라면 이 허리띠가 시적 화자 자신의 허리띠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君)의 허리띠가 헐거워졌는지 아닌지는 시적 화자가 직접 확인할 수 없으니, 뭐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문제일 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적 화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君)의 상태를 넓은 아량으로, 또는 뛰어난 상상력으로, 또는 이심전심의 깊은 애정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면 ‘헐거워지네’는 추측의 뉘앙스를 넣어서 ‘헐거워지겠네’나 ‘헐거워지겠군’ 정도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시적 화자가 그대(君)에 대한 근심 걱정과 그리움으로 입맛도 떨어지고 하여 허리띠가 헐거워질 만큼 홀쭉하게 야위었음을 토로하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나 신세타령으로 읽어야 의미상 조화로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 정서적으로 어쩐지 짙은 하소연의 느낌이 나거든요.

   그대(君)를 향한 시적 화자 자신의 하소연, 곧 오래도록 소식 한 점 보내오지 않는 그대에 대한 속절없이 원망 섞인 하소연―. 자신이 지금 이렇다는 사실을 좀 알아달라는 것이지요. 간곡한 부탁이요 소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허리띠를 시적 화자의 허리띠라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북쪽과 남쪽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조금 더 가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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