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블로바
더운 여름, 인당 최소 30만 원이 넘는 돈을 써가며 나오는 테이스팅 메뉴들을 즐기다 갑자기 끼니의 마지막 순간에 묵직한 다크 초콜릿 무스 케이크가 디저트로 나오면 나는 단 한 숟갈도 먹지 않는다.
아무리 최상급의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흠잡을 것 하나 없는 다크 초콜릿 무스라 하더라도 쪄 죽을 것 같은 여름에는 거부감이 든다.
다 먹고 샴페인으로 내린다 하더라도 애초에 난 샴페인과 다크 또는 밀크 초콜릿의 페어링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에 더욱이 손이 가지 않는다.
너무 더워서 집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고민까지 하게 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그런 더위에도 손님들은 돈을 쓰기 위해 레스토랑에 간다.
제철 재료가 가득 담긴 여름스러운 요리들을 먹다 묵직한 디저트로 마무리하더라도 그 고급진 달달함에 감동할 사람들도 분명 많다.
하지만 그 디저트를 개발하고 메뉴에 올리는 것은 셰프의 일.
그리고 본인이 메뉴에 올린 요리는 당신이 어떤 셰프인지 그릇 위에서 설명해 준다.
메뉴를 개발하기 전에 셰프로서 생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앞서 나갈 테이스팅 메뉴들의 흐름을 읽고, 계절을 읽고, 손님을 읽는 것이다.
묵직한 초콜릿 디저트로 단순한 고급진 감동을 선사할 것 인지, 아니면 당신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손님들에게 피날레를 선사할 것 인지.
어느 여름, ‘아이스크림이 생각나지 않을 디저트를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을 문득 했다.
애초에 다섯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 스쿱을 디저트 메뉴 대신 선택할 수 있도록 옵션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이 생각나지 않을 디저트를 만들어 보려는 기획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미동부의 여름은 ‘베리’의 계절이다.
블루베리, 라즈베리, 그리고 블랙베리.
모두가 정말 달고 새콤한 게 씨알도 크다.
이런 베리들을 사용하지 않고 여름을 보낸다는 것은 파티시에로서 계절 낭비다.
나는 술을 즐겨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베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복분자이다.
블랙베리를 라즈베리와 적절한 비율로 블랜딩을 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복분자의 맛이 나는데 나는 그것을 노렸다.
미국인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그 맛.
메뉴개발을 할 때 파머스 마켓(시장)에 가서도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할 때면 어릴 적 기억을 더듬는다.
‘그때 내가 어떤 달달구리들을 좋아했었지?’
요플레였다.
요거트 + 과일잼. 내가 가장 좋아했던 디저트.
그럼 플라스틱 작은 용기에 담겨있던 요거트를 접시 위로 꺼낼 차례다.
요거트에 화이트 초콜릿과 바닐라 씨앗을 블랜딩 해서 더 우유 풍미가 깊어진 요거트 베이스를 만들었다.
너무 맛있었다.
그냥 매일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이었다.
화이트 초콜릿이 갖고 있는 지방 때문에 요거트의 텍스쳐도 더 무게감이 실려 플레이팅 하기 편해졌을 뿐 만 아니라 바닐라 씨앗은 요거트의 불편할 수 있을 신 맛을 너무나도 고급지게 업그레이드 시켰다.
약간의 여름스러운 허브를 넣은 라즈베리&블랙베리 잼은 어릴 적 할머니가 주셨던 오래 다린 복분자 주스처럼 눈이 희번덕 커지는 인상 깊은 맛이었다.
달고 새콤한 게 자꾸 맛을 보게 되고 입에 침이 고이는 그런 맛 말이다.
과일을 메인으로 디저트를 할 때 접시 위 가장 좋아하는 구성요소를 고르라 한다면 ‘Coulis’ 쿨리이다.
쿨리는 과일의 섬유질을 최대한 살려 만다는 과일 소스이다.
라즈베리를 미니 절구에 넣고 레몬즙을 조금 뿌린 후 살살 압력을 가해 둘러 누르다 보면 펙틴과 설탕을 따로 넣어 가열 조리 할 필요 없이 라즈베리 본연의 매력을 그대로 살린 쿨리를 만들 수 있다.
라즈베리의 매력은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맛이 천지차이라는 것.
라즈베리는 약간의 레몬즙을 만났을 때 그가 갖고 있는 풋내는 사라지고 라즈베리가 잔뜩 들어간 고급진 프로세코의 맛이 난다.
이 여러 구성 요소들을 한 접시에 예쁘게 표현하여 손님의 테이블 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예술적인 주제가 필요하다.
요거트와 베리가 그저 심심한 요소가 되지 않게 작품으로 거듭나게 할 그 기둥을 골라야 한다.
뽀얀 요거트 크림에 보랏빛 잼과 빨간 쿨리는 그저 한 명의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공연.
바로 ‘파블로바’.
파블로바는 1900년대의 유명한 발레리나 중 한 명이다.
그녀를 기리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뽀얀 머랭 디저트는 그녀의 이름을 따 ‘파블로바‘라고 불려왔다.
보랏빛 잼과 빨간 쿨리로 그녀의 아름다운 춤선을 표현하고 싶었고 둥근 돔 모양의 머랭으로 그녀의 발레 드레스 '튀튀'를 그리고 싶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어디서나 사 먹을 수 있는 파블로바 케이크를 접시라는 도화지에 색다른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튀튀 머랭을 스푼으로 톡 깨어 산뜻한 베리 잼과 라즈베리 쿨리를 떠서 함께 먹는 순간 당신은 눈을 감게 될 것이고 코와 입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 맛을 감상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요플레가 준 아이디어가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 요리사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다라고 말 하고 싶다.
그 여름, 손님들에게 나의 작품을 한 편의 발레 무대에 비유할 수 있어 감사했던
Pavlova,
이야기가 담긴 음식은 맛없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