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에 마주할 수 있을까
늦은 저녁 시간.
빨래를 개다 말고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빨래 더미 사이에 누웠다.
그저 멍하게 누워있을 뿐인데 눈물이 났다.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온몸을 감싸고 ‘나란 존재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의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가라앉았다.
빨래 개는 것이 뭐라고.
사실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매일, 그보다 더 후에는 종종, 그 후에는 가끔. 요즘에는 자주. 그랬다.
최근 슬기로운 의사 생활 드라마를 다시 봐서 그런가.
그즈음부터 다시 마음 한구석 공백이 커지기 시작했다.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열심히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잠이 들다 새벽에 깨면 눈물이 났다.
난 소리 없이 우는 것은 자신 있으니까.
잠이 든 것도, 깬 것도 아닌 상태로 온갖 생각들에 묻히다 보면 울다 자다 아침이 되었다.
그러다 며칠 전.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깼다.
마냥 누워서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글쓰기 마무리를 할 생각으로 거실로 나왔다.
노트북을 열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열어 이런 저런 릴스를 보니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한 엄마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렵게 가지게 된 아이들에 대한 내용, 예민한 아이들의 육아로 힘들었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한 글에는 아이의 심리 문제로 상담을 받았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상담사는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질문했다.
“엄마. 엄마는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숨이 턱 막혔다.
그 엄마가 가진 불안이 나에게로 다가와 나의 불안에 문을 두드렸다.
상실을 품은 사람의 마음.
상실의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순조로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안과 만나게 된다.
그 불안은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는 것일까. 감추면 나아지는 것일까.
난 아니던데.
내 마음을 외면할수록 점점 더 외로워질 뿐이었다.
나도 그 엄마처럼 불안에 마주할 수 있을까.
둘째를 출산한 후, 산후우울증이 매우 심하게 찾아왔었다. 처음엔 새해의 시린 겨울만 되면 눈물이 났다.
매서운 칼바람의 눈물로 치부해 버리고 싶었지만, 시리지만 따뜻한 날에도 눈물이 났다.
일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땐 괜찮았지만,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
퇴근길, 잠자다 깬 새벽엔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은 겨울이 되면 “아직도 겨울에 마음이 힘들어요?”라고 물어본다.
“아니. 이젠 좀 괜찮아졌어요.” 라고 대답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괜찮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겨울만 되면 무력감이 ‘날 잊은 거 아니지?’라며 찾아왔다.
새해니까. 올해는 다르겠지. 더 나아지겠지. 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시기기에 더 활기차지려고 노력했었다. 어쩌면 발버둥을 쳤나보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나면 봄이 되었다.
나와 너의 생일이 있는 3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
따뜻한 봄바람과 금방이라도 팝콘 터질 것 같은 꽃봉오리. 슬픔과 우울 따윈 봄 냄새에 묻혀 사라질 것 같은 3월이 좋았다. 그렇게 그 시기를 보내고 나면 좋아져야 하는데.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무력이, 우울이, 슬픔이를 ‘왔구나’ 하고 반겼어야 했는데,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출입금지 푯말을 붙여놓고 있으니 점점 커지고 많아졌다.
그렇게 불쑥불쑥 눈물이 되어 자신들을 알아봐달라고 아우성칠 뿐이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드라마 중 나왔던 말이다.
그동안의 슬픔과 우울과 자책이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큰 힘이 되었었다.
나에게 하는 말. 이제는 용기를 내서 내 마음에 손을 내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