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경험 : 고립과 자유

by 김명복

2022년 7월, 나는 평택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4개월 만에, 다시 안동으로 내려왔다. 퇴사라는 선택 앞에서 확신보다는 불안이 컸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이렇게 계속 버틸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처음 안동에 내려왔을 때, 내 삶이 어떻게 그려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할 겨를 조차 없었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우울을 어떻게 감당하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울 때문이 아니라, 내 인생을 위해 멈추기로 선택한 것이다. 돈을 번다고 내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 같지 않았고, 무엇보다 즐겁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철이 없다고, 너무 순진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런 말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우울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해졌고, 모두가 남을 때 과감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과거의 나와도 멀어지면서, 내가 했던 생각과 행동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성적이다.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다. 행동은 적고 생각이 많다 보니 나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생각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애쓰지 않기로 했다. 원래도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혼자를 선택하면서 더욱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감은 안개처럼 희미해졌고, 가족들과의 거리도 최소한 접점만 남긴 채, 오직 나 혼자가 되는 시간을 늘려 갔다.


퇴사를 하고, 내가 처음 한 것은 돈 버는 일이었다. ‘월 30만 원만 벌자.’ 내가 했던 일은 ‘엣시’였다. 엣시(Etsy)는 미국 쇼핑몰이다. 디지털 파일을 올리면, 고객이 결제를 후 다운로드하는 방식이다. 월 30만 원 정도 수입이 있었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 월 1만 원으로 떨어졌다. 사실 퇴사 전부터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렸다. 평일엔 퇴근 후, 주말 엔 남는 시간을 활용해 작업을 했다. 그때는 항상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시간 너무 부족하다. 출근만 안 하면 더 많이 그릴 수 있을 텐데..’

이제 내가 원했던 데로 모든 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2주가 지나자 작업이 지겨워졌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점점 확신이 사라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돈을 벌려고 퇴사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퇴사를 했다.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서. 그런데 나는 또다시 돈을 좇고 있었다.


돈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때의 난 돈 보다 내면의 가치에 더 우선을 두기로 선택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 또다시 돈을 좇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 내면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돈과 시간, 체력, 여유. 모든 게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가 없었다. 바로 호기심이었다. 목표와 꿈, 그리고 희망과 욕망, 모든 것은 결국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호기심을 잃어버린다.


아이처럼 세상을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볼 때 세상은 여행으로 변한다. 하지만 어른은 호기심 대신 성공과 실패로 판단한다. 아이들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할 때, ‘그거 돈이 돼? 필요 있어? 쓸모없는데 그거 왜 하는 거야’라고 판단한다.


피카소는 평생을 바쳐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니체는 ‘어린아이가 돼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회는 우리에게 어린아이가 아니라, 타인의 세상 속에 시키는 대로 순응하는 ‘낙타’가 되라고 가르친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뭘까?” 내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비가 오면 어른들은 웅덩이를 피해 가지만,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며 깔깔 웃는다. 눈이 오면 어른들은 주머니 속 손처럼 움츠러들지만, 아이들은 눈을 맞으며 자기보다 큰 눈사람을 만든다. 온몸으로 계절을 만끽한다. 어쩌면 자유란, 세상을 다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새벽 공기가 좋다. 출근길 새벽 5시, 차갑고 싱그러운 공기를 들이마시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다. 퇴사 후, 나는 새벽을 더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좋았던 시간은 새벽 2시에서 4시 30분이다. 5시가 되면 참새 소리가 들리고, 출근하는 자동차 소리에 고요함이 깨지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읽고 기록하는 시간이다. 가장 편안한 순간은 남들 출근할 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걷는 시간이다. 그 순간만이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자유는 거창한 게 아니었다.

가장 나다운 순간에, 가장 나다운 공간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자유였다.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그 자유와 행복이 대체 어떤 모습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선뜻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듯, 자유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유마저도 ‘정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는 우리에게 ‘경제적 자유’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언제부터 자유를 돈으로만 계산하게 되었을까?


돈이 많다고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돈이 없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그 자유를 내 방식대로 정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자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나다운 순간을 찾을 때, 햇살처럼 스며든다.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자유란, 어쩌면 시간과 세월 속에서 천천히 나를 닮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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