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빨간 어묵
먼 타향살이를 하면서 제일 그리운 건 바로 고향의 맛이다.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고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향의 음식들.
내 고향인 제천은 빨간 어묵이 유명하다.
아빠는 아주 오래전부터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빨간 어묵을 잔뜩 포장해 왔다.
남동생과 내가 좋아한다며 시장에서부터 소중하게 반쯤 불은 빨간 어묵을 안고 들어오셨다.
매콤한 떡볶이 소스가 잔뜩 밴 빨간 어묵.
아빠가 술을 마시는 날이면 늘 맛보는 미지근한 빨간 어묵 맛은 내게 오래된 추억의 맛이었다.
임신을 한 이후에는 엄마 음식이나 새삼 예전에 먹었던 음식들이 그리워졌다.
때문에 오랜만에 제천에 오자마자 먹고 싶었던 것도 다름 아닌 빨간 어묵이었다.
어릴 적의 기억을 살려 집에서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그 맛이 나질 않았고 따라 할수록 더 그리워질 뿐이었다.
한동안 입덧이 심한 와중에도 빨간 어묵이 아른거려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시장으로 가 갓 만든 빨간 어묵을 사 먹었는데
생각만큼 맛있지 않아서 고작 한두 입 먹고 실망스럽게 집에 돌아왔다.
'먹고 싶었던 음식인데 예전처럼 맛있지 않네-' 생각하면서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퇴근길에 아빠가 똑같은 집의 빨간 어묵을 사 왔다.
빨간 어묵뿐만 아니라 아빠의 다른 손엔 한 아름 내가 좋아하는 과일들이 들려있었다.
아빠와 나는 오래전부터 데면데면한 사이라
아빠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어색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하다 아빠의 손에 들린 빨간 어묵을 보고 웬 빨간 어묵이냐 물으니 내가 좋아해서 사 왔다며 툭 식탁에 올려놓았다.
무심하게 건네는 아빠의 말속에 다정함이 묻어있었다.
낮에 먹었던 빨간 어묵을 생각하며 별 기대 없이 투박하게 묶여있는 봉지를 여니 추억의 향이 물밀듯 몰려왔다.
문득 아빠가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신이 나서 빨간 어묵을 집어 들던 어린 날의 동생과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먹는 밤중의 빨간 어묵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어서 아빠가 늦는 날이면 은근히 빨간 어묵을 기다렸다.
밤늦은 시간, 기억 속 적당히 취한 아빠는 빨간 어묵을 권하는 우리에게 많이 먹고 왔다며 항상 맞은편에 앉아 동생과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힘든 날이면 가족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위로를 얻었을 젊은 날의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 이번에도 반쯤 불은 빨간 어묵을 먹으며 어쩐지 자꾸만 눈물이 났다.
너무 늦게 그때의 아빠를 이해하게 된 서툰 내 모습에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익숙한 맛, 분명히 같은 집의 빨간 어묵인데 그 미지근한 빨간 어묵이 너무 맛있었다.
낮에 먹었던 빨간 어묵이 생각보다 맛있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가 이 익숙한 불은 빨간 어묵이 아니어서였나 보다, 생각했다.
앉은자리에서 입덧도 잊은 채 한가득 담긴 빨간 어묵을 전부 먹고는 용기를 내 아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빨간 어묵을 먹으니 살 것 같다고, 역시 이 집 빨간 어묵이 제일 맛있다고. 내 말에 아빠는 어렴풋이 웃었다.
다음날엔 내가 빨간 어묵을 잘 먹는 게 내심 좋았던 건지 들어오는 길에 어묵을 사 온 아빠가 직접 빨간 어묵을 만들어주셨다.
나를 위해 요리를 하는 아빠의 뒷모습도 좋았고 잘 먹는 나를 보며 ' 아빠가 만든 게 더 맛있지! ' 얘기하는 아빠의 얼굴이 행복해 보여서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표현이 서툰 아빠의 마음이 느껴지는 빨간 어묵.
아마 오래도록 나는 고향의 맛 그 자체인 아빠의 빨간 어묵이 그리울 것 같다.
아빠가 만들어 준 빨간 어묵도, 불은 빨간 어묵도 내겐 모두 소중하다.
앞으로도 아빠의 마음이 담긴 빨간 어묵을 계속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