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한 조각을 예술품으로 전시하고, 그 작품을 1억 5천만 원에 거래한 실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 자체는, 이를 경배하는 이들에게 희화화하는 전복이며 냉소로서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자 한 봉지를 7만 원에 판매한 어느 상인은, 부당이득죄의 파렴치한 장사꾼으로 내몰렸다.
어느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산삼이 비싼 것은, 예전에 교통이 불편했을 때 그것이 자랄 만한 험준 산령에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산삼 자체의 희귀성도 그랬지만, 접근성 애로로 취득이 쉽지 않아 그 가격이 천문학적이었다고...
거기에 천정부지의 대가를 덧붙인 건, 신화에 의한 신비주의도 한몫 거들었다. 영약으로서의 산삼이, 실제 효능에 비해 획득
의 난해함을 섞어 한껏 상류 화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맹신적 애착이 덧붙여진 것이고...
치렁치렁한 수염을 한 백발의 산신령부터, 백사가 산삼을 삼키고 눈밭에 뒹구는 등 꿈에 나타나는 것은 다들 영험한 계시를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거기에다가 그 출연자가 하는 말은, 산삼이란 본래 새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는 주거지 인근에 그 씨앗을 배설한 것이 성장한 것이어서, 눈에 수월하게 띄는 것들은 빠른 시간 안에 채취되고 그래서 깊은 산에 남은 것이 그 귀하디 귀한 천삼, 산삼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산삼에 관한 이야기들이 신화로 가득 찼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에야, 굳이 재력을 과시하거나 사회적 평가를 드높이기(?) 위한 과시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에 비견한 장뇌삼이 그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산삼의 신비주의가 대중화로 넘어가, 산삼이든 천삼이든 그 자체의 신비는 힘을 많이 잃긴 한 셈이다. 가끔씩 백 년 된 산삼이 한 뿌리에 억대씩 거래된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제 그것은 전설 속 영험함보다는 그 신비를 돈으로 구입한 능력자이며 거기에 얹힌 사회적 평판으로 더 관심사가 옮겨진 것은 아닐까?
물론, 효능의 과장은 산삼 자체뿐 아니라, 그것을 강한 신념으로 믿고 매달리는 환자 등에게도 맹목화된 채 말이다.
모든 건 세속화의 침입 속에서 그 신비감을 상실한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신비주의화 하게 된다. 인삼이 흔해 빠져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가 될수록, 산삼은 더욱 영롱한 하늘의 약초가 되는 것이다.
예술을 여기에 비유하면 정말 어불성설일 수 있으나, 예술이 자체로서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인삼 같으면 사실 예술이라 말하기는 힘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깊이 있는 사유가 새겨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단순 그림이나 리듬 따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예술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고립되며, 사회적 계급을 구분하는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예술은 신화가 필요한 듯하다. 그것은 모사에 의한 제작이나 대량 생산 등, 물신화를 초래하지만, 분명 그것으로부터는 분리된 물자체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인삼이 산삼의 효능을 모방하더라도 그것들은 확연히 구분되듯이, 예술에서도 그것의 고유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큰 관심사일 것이다. 그래서, 모사품, 표절작뿐 아니라, AI가 '생산' 또는 '제작'하는 작품을 보면, 그것의 고고함은 보다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AI 작품은 '창작'이 아니라, 에너지의 단순한 전환이라 폄하해도, 창작에 의한 예술과의 구분은 한층 난감해지고 있다.
'단순한 낱낱의 소리가 아닌 선율로 느끼기'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다.
창작자도 도구를 쓰지만, 그것은 영혼의 연장[연장(TOOL)이며 연장(EXTENSION)이다]이며, 다만 '제작'하거나 '생산'하는 것으로서의 연장(EQUIPMENT)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인삼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산삼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처럼, 어떤 방법으로 이를 드러낼 것이라는 말인가?
바나나 한 조각 전시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전복으로서의 잠재성 같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실 AI가 하는 작업 결과물이 예술작품임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면서 이를 무시할 마땅한 근거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은 자연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예술가에겐, 상징 세계를 넘어 실재를 끄집어내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종 회귀 지점이 자연임을 말하는 것이고, 실제 인간은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예술이란 사슬 내에서 그 수준의 상하를 다룰망정, 제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예술에서 비예술로 전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대중문화와 고집스러운 거리를 두는 오해 섞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AI는 돌아갈 자연이 없다. 인간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간다. 자연이 품는 미(BEATY)는 예술로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만 열리고 닫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유를 들면, 산삼. 천삼은 예술, 장뇌삼은 AI, 인삼은 모사품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라지나 더덕 등 비슷한 성분을 함유한 최상품 약재는 산삼 못잖거나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교 기준은 A+급 산삼을 기준으로 대체품을 비교한 것이므로, ' A+급 산삼 vs, 상한 산삼, 더덕, 도라지...'인 것이지, D급 산삼 대 A급 더덕을 비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산삼은 썩어도 산삼인 것이다.
그래서, AI 작품에 대한 논쟁은, 예술의 연장(EXTENSION)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의 향유의 연장(EXTENSION)으로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