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에 처음 살기 시작했던 것은 2015년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 종량제 봉투의 색깔이 바뀌었고, 버스 노선이 거의 하나에 불과해서 내 동선은 집 근방 5km 내외에 묶여 버렸다. 서해에 있는 무인도처럼 고립되었다. 20대 초반이었고, 천둥벌거숭이였다. 고등학교 때 남에게 등 떠밀리듯이 전학 갔을 때 교감선생님이 해줬던 말을 이 나이 되어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어른들이 가장 힘들어할 때는 신혼생활 시작할 때고,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할 때는 전학 올 때래. 니 감당할 수 있겠나."
미용실과 식당은 새로 뚫어서 정착해야 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정해야 할지, 죽어가는 파리 날개처럼 파르륵 거리는 형광등과 이사하느라 쌓인 대형쓰레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안산 주민인 척 동사무소에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댔다. 이민 온 것도 아닌데 이렇게 헤맬 줄 몰랐다. '안산은 밤에 귀신이 나온다, 특정 나라 사람들이 칼을 들고 다닌다'는 괴담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신입생으로서 학교에도 적응 못했던 시기였다. 학교 앞 맛집은 대부분 2인분 이상 파는 곳이었고, 내 밥은 밥버거나 브리또 같은 메뉴로 고정되었다. 잇몸이 수시로 땡땡 부었고, 합법적으로 피 안 나오게 양치하는 방법을 연구해 댔다. 밤마다 불도 끄지 못하고 새벽 세 시가 넘어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옷도 평소 입던 것보다 가슴둘레가 10cm나 더 큰 티셔츠만 찾아 입었고, 메이크업이나 기초화장 단계도 많이 생략했다. 스스로 왜 이렇게 방황하는지 몰랐다. '적응한다'는 단어의 뜻을 몰랐기에.
졸업을 하고 몇 년이나 지난 지금, 월피동의 로드뷰를 우연히 다시 볼 일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이팝나무가 마치 가로등처럼 도열하여 수십 그루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쌍방 목례할 듯이 마주 보고 있었다. 광덕산 2로였다. 비록 사진이었지만, 실처럼 옅게 휘날리는 꽃잎이 보이는 듯싶었다. 나는 그제야 돋보기를 들이댄 듯이 미시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때는 눈앞에 두고도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예대 방면으로 가는 사거리에 있는 CU편의점을 등지고 안산천 방향을 내려다보면 전경이 보인다. 서 있으면 불어오던 바람, 바로 옆에 있던 대파꽃밭이 떠오른다. 사적으로 있었던 수많은 인간관계에서의 이별과 종종 일어났던 부조리한 일들은 내 눈을 일시적으로 멀게 만들었다. 왜 안산이 옆 동네 수원이나 용인에 비해 여행 인프라가 열악한 지는 차차 고민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안산에 대한 뒤늦은 짝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얼마나 좋은 곳인지 혼자만 알고 있기는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