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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눈

따스한 부산의 첫눈, 아기눈

by 미르 Feb 13. 2025

오전 11시

갑자기 거실이 캄캄하다.


거실 불을 켜야 하나

일어났다가

무심코 바라본 창밖.


우와, 눈이다.

눈.


요 며칠 굉장히 춥긴 했다.

아침에 날씨를 알려주는 앱에

눈이라 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올겨울 눈을

부산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양치기 소년의

공허한  외침이려니 여겼다.


고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눈.

사선이다.


바람 많은 부산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강풍주의보와 합쳐진 눈.


사선으로

세차게

그어지고 있다.


눈이다.

눈을 보러 가자.


이게 몇 년 만에 보는 눈인가.


주섬주섬 재빨리

중무장을 한다.


우산.

눈 오는 날에는 투명 우산이지.


내리는 눈을

고개를 들어

감히 바라볼 수는 없어도


투명우산이 있다면

나는 천하무적.


앗, 오늘은

엘리베이터 점검 날.

설마 지금은 다 끝났겠지?


빨리 와라, 엘리베이터야.

지금 눈이 온단다.


눈을 보러 가는

두근두근하는

내 마음.


 소리가 들리니?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젊은 남자분.

옷차림은 가벼워 보이지만

인사하는 입가에

슬그머니 번지는 미소.


그쪽도

혹시 눈을 보러 가시나요?


와, 눈이다.


투명 우산에 부딪치는

타닥타닥 눈 소리.


빗소리보다는

묵직하지만

눈에 보이는 밝음으로

내 마음은 가볍네.


아파트 바로 옆

강변 산책길로 가는 길.


"앗, 안 돼."

휴대폰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

여학생의 안타까운 비명 소리.


뭐가,

뭐가 안되는데?


아, 안 돼.

눈이 눈이

그치고 있잖아.


고층에서 보았던

세찬 사선의 눈은

어느새

팔랑팔랑거리는

작은 솜뭉치.


급하게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했지만

이건 눈도 아니다.

하늘을 나는 먼지 조각들.


이런 일이.

이럴 줄 알았다면

베란다에서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걸.


어서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은 욕심에

밖에 나오느라

눈사진을 놓쳤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아직

눈이 쌓여 있는 곳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급한 마음에

스마트폰 터치 장갑을 벗고

눈이 녹을세라

사진을 찍는다.


하얀 소금 같은

귀중한

눈의

흔적들.



날이 춥기는 춥구나.

하늘거리는 눈 몇 송이 속에서

사진 몇 장 잠깐 찍는데도

손이 이렇게 시리다.


올겨울 위쪽 지방은

이제 눈 좀 그만 와라고

욕을 한다고 하는데.


부산은 올겨울 첫눈.

10분 정도 내렸으려나.


내 마음을

온통 다 가져가 버린 시간.


곧이어

바로 노란 햇살이 비치고

눈의 흔적은

보이지도 않고.


신기루인 듯한

느낌은 그대로인데.


아기 눈.

오늘 눈 구경을 했다.


잠깐 내리는 눈을 봤으니

운이 좋다.


부산 사람들,

쌓이지도 않는 눈을 보고

아주 설렜던 시간.


또 눈이 오려나

하늘을 보고 또 봤던 시간들.


푸르른 하늘에

하얀 진한 구름이

뭉실뭉실 떠다니던 시간.


하루 종일

님을 기다리는 아낙네처럼

두근두근.


아, 다음에는

맛보기 눈 말고 본격적인 눈을

보고 싶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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