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쌓아온 그림들에게서 위안을 받다.
나는 아홉 살 때까지 동해 앞에서 살았었다. 친구도 몇 없어 한 친구와만 매일 함께 놀았는데, 주 놀이터는 당연히 바닷가였다. 날이 더울 땐 바다에 풍덩 빠져 놀았고, 날이 추울 땐 모래사장에서 뛰어놀았다. 가장 많이 했던 놀이는 더우나 추우나 가능했던 모래성 만들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나뭇가지 하나 위에 꽂아놓고 우기는 것에 가까웠지만 우리는 꽤 만족했었다. 특히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만드는 걸 좋아했고 소유욕도 상당했던 탓에 내가 만든 모래성에 애착이 강했다. 하지만 모래성을 집으로 가져올 순 없었으므로 그날의 모래성은 그날에 머물렀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게 하나 더 있었다. 그림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유치원 졸업앨범을 다시 보니 장래 희망 칸에도 떡하니 ‘화가’가 쓰여 있어 놀랐다. 그러고 보면 가장 어릴 때의 기억도 그림책을 가위로 자르고 놀던 모습이다. 신기하게도 그림은 모래성 쌓기와 닮은 구석이 많다. 모래성이 모래만 있으면 어디서든 만들 수 있듯, 그림도 종이만 있다면 어디서든 그릴 수 있다. 똑같은 걸 또 그려 보아도 그릴 때마다 다르고, 쌓으려면 얼마든지 더 쌓을 수 있다. 모래성을 계속 쌓다 보면 더 단단하고 크게 만드는 요령이 생기는데, 그림도 마찬가지다. 계속 그리다 보면 성장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다른 점도 있다. 다음 날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모래성과 달리 그림은 언제든 다시 꺼내볼 수 있다. 유치원 졸업앨범엔 알아보긴 힘들지만 내가 그린 그림들이 참 많다. 비눗방울로 그린 그림, 손바닥을 찍어 그린 그림들에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담겨 있다.
2023년 3월 6일은 내가 공식적으로 회사 밖으로 나온 날이다.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나와 허허벌판에 발을 딛었다고 하고 싶지만, 사실 운이 좋아 빠르게 내 모래성을 쌓아 올렸다. 고정 수입을 확보한 후 퇴사했기 때문에 한 번도 추위에 떨었던 적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바깥세상은 춥겠지?’ 하며 두려움에 떨었던 적 정도만 있다. 퇴사 직후 한동안은 너무 바빠서 울며 한탄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배가 불러도 단단히 불렀다. 그 벌을 받는지 지금은 너무 막막해서 운다. 그간 쌓은 모래성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이 통장에는 서리가 꼈고 내 마음엔 한파가 찾아왔다.
실수를 반복하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은데 왜 항상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원인을 찾아보게 되는 걸까? 원인이라도 찾아보니 다행인 걸까? 다 무너져가는 내 보금자리를 바라보며 분석했고, 한두 가지는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모래를 쌓아 올리는 데만 급급해서 이 일 저 일 되는대로 해왔다. 물 한 방울 섞지 않고 그저 퍼붓기만 했으니 거센 바람 높은 파도가 우리 앞을 갈라서면 무너질 성이었다. 그래도 가끔 오는 비에 빗물이 섞여 자연스레 조금씩 단단해지기도 했다. 그때라도 형체를 좀 잡아볼걸, 그 위로 다시 모래를 양동이 채 부었다. 참 운이 좋은 한 해였다. 그 성안에서 나는 종종 따뜻했고, 감기 걸릴 일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구직활동도 ‘조금은’ 했다. 오만했다. 뒤늦은 후회는 의미 없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2024년도로 들어서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더니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성의 바닥을 보는 마음은 참담했지만, 통장이 더 심각했기에 빠르게 마음을 억지로 다잡아야만 했다. 월 천만 원 후기가 넘쳐나는 으리으리한 성들 사이에서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마음이 가난할수록 허튼 길로 들어서기에 십상이다. 핸드폰에서 유튜브도 지우고 그 자리에 온라인 강의들을 끼워 넣었다. 그뿐 아니라 스터디, 챌린지, 전자책, 학원 등 다양한 배움을 끼워 넣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기본기였다. 바닷물을 머금은 모래를 한 웅큼 가져와 섞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태풍이 찾아와 무너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도 주저앉고 싶었다. 아직 부족한가? 싶어 학원과 온라인 강의와 챌린지를 한 번에 병행해 보기도 했다. 역시나 욕심이 과했다. 배움이 너무 많아도 무너졌다. 대체 어쩌란 말이냐. 지속하는 힘, 꾸준함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힘없이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서 그 위에 새롭게 쌓아 올렸다. 마치 그림을 고치고 또 고쳐가며 더 나은 형태를 찾아갔던 것처럼.
그 덕분에 포트폴리오에 간신히 몇 줄의 경력이 더 추가 되었다. 하지만 나 하나 계속 벌어먹고 살기엔 부족했다. 조금 더 의미 있는 성과와 수입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후로 특별히 더 해낸 일이나 성과도 없었고, 그만큼 수입이 늘어나지 않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가끔 찾아오는 기회가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작년에 느끼던 감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가끔은 남을 탓하는 게 편할 때가 있다. 사람을 탓하기는 싫고 괜스레 오래된 낡은 컴퓨터를 탓해본다. 언젠가부터 여는 데 한참 걸리는 외장하드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그런데 이상하다. 용량이… 줄어들었나? 가만 보니 용량이 꽤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고정 클라이언트는 늘 있었으니 당연한 건가? 시간은 많으니, 오랜만에 개인 그림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잠깐의 렉 이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헉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93개 항목. 올해 외주를 제외하고 그린 개인 그림 폴더의 항목 수였다. 애걔? 싶을 수 있다. 잠시만 들어봐 주시길 바란다! 이 93개 항목 안에는 폴더도 몇 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아이패드나 노트에서 미처 옮기지 못한 그림이 훨씬 많고 개인 만화는 아예 다른 폴더에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직 9월인데 내가 올해 동안 그린 그림이 100장은 가뿐히 넘었고, 150장도 우습고, 200장도 콧방귀가 나온다는 뜻이다. 사실은 중간부터 세기를 포기했으므로 몇백 장인지 모르겠다.
올해 일이 줄어드는 걸 보며 불안한 나에게 다짐하듯 그려왔었다.
“내 부족함을 마주할 때일지도 몰라. 천천히 기본기부터 다시 쌓아 올리자.”
“빨리 자리 잡고 싶어. 하지만 휘둘려선 안 돼. 공부하자.”
“그동안 믿고 맡겨주신 분들께도 더 좋은 그림으로 보답하고 싶어.”
종이에 꾹꾹 눌러 담은 마음들이 드디어 지금의 나에게 다가와 위로를 건넨다.
“이제는 네가 쌓아온 것들을 믿어.”
그래, 정말 많이 쌓아왔다. 몇천, 몇만 장씩 그리셨을 작가님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에겐 분명히 큰 숫자였다. 더군다나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 쌓아온 시간이었다. 그 그림들에 그간의 내 마음들이 모두 녹아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 매일 펜을 붙들고 있었다. 지금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내가 쌓아 온,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게 보내준 메시지였다.
그간 내 모래성이 너무 작고 모양도 보잘것없어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었다. 이거 완성이 되긴 하는 건가? 늘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조금 멀리서 바라보니 예전의 모래성보다 작을지언정 훨씬 단단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근사한 성을 가진 작가님들도 여전히 계속해서 성을 다듬고 계셨다. 그제야 너무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림이라는 성에 완성이 없듯, 이 길엔 끝이 없다.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왜 완성되지 않았다고 자책하고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이 길에 끝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도착해야만 한다고.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성을 계속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누군가 함께 만들자고 찾아오기도 한다. 때론 쉬다가는 이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그림성에 초대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오늘은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로 한다. 그동안의 시간을 존중하니 스스로가 기특하고 멋있기까지 하다. 잘 버텨오고 있었으니까. 누가 뭐라든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성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써오고 있었다.
그동안 통장에 찍히는 숫자와 경력 사항에 남겨진 문장들만이 성취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끔은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보다 나 자신의 인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서에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이 그림들은 모두 내게 과정이자 성과임이 분명했다. 발버둥을 치면서도 펜을 놓지는 않았구나.
지난 그림들을 쭉 둘러보니 시간 흐름에 따라 아주 조금씩 성장하기도 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타인의 그림만 부러워하느라 보이지 않았었다. 특히 올해는 이뤄낸 게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더욱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나도 조금 성장했다.
프리랜서로 사는 것도 역시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지만, 그런데도 계속해서 성을 쌓아나간다. 정답 없이 순간순간의 선택이 나만의 성을 만들어간다. 내년에는 잘 될 수 있을까? 올해는 내내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픽 웃음이 난다. 나는 충분히 내 속도대로 내 성을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9월에는 100일 챌린지가 유행했었다. 이제는 100일 챌린지가 지나고 50일 챌린지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다. 12월 31일까지 매일 달려보자는 뜻이다. 좋은 목표인 것 같아 나도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기록을 보고 나니 안심이다. 남은 3개월은 더 이상 그런 숫자들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저 평소처럼 매일 그리며 배움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 성도 반짝일 테니까.
올해는 참 힘든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고, 힘들고 불안할수록 더 공부하며 버텼습니다.
저는 원래 꾸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올해는 제법 꾸준함의 근력이 생긴 것 같아요.
9월의 어느 날 외장하드를 정리하면서 보니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뿌듯하더라고요.
어떤 성취보다도 그 과정들을 들여다보는 게 훨씬 뜻깊고 값지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올해는 꾸준히 해내가는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들 때에도 포기 않고 해 온 순간들은 보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글을 쓰고 다듬는 중에 또 좋은 소식이 몇 가지 들려왔어요.
역시 포기하지 않길 잘 했어요. 내년에도 조금 더 지속할 수 있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