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37] 삽질의 조건
D-337. Sentence
삽질의 조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험이 나에게 얼마나 있었는지 돌아보면, 나는 그러한 경험 자체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극히 목적지향적인 사람.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순 있으나, 가시화된 결과가 없는 무언가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참 아깝다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에겐 사치였다.
학교에 남길 바랐던 사람으로, 내 이름이 걸려 있는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책을 보고,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는 삶을 갈망했던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길은 결코 여유로울 수 없었고, 시간은 늘 부족했다. 3년이면 점수인정을 받지 못하는 논문의 특성상 늘 논문 점수를 채우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고, 여러 학교의 수업이 맡겨졌었다. 순수학문이 아닌 실무중심 분야였기에 실무도 놓을 수 없어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험도, 순수한 몰입도 내 인생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래서 매 순간 분 단위로 달리고 있으면서도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공예품을 만들고, 뜨개질을 하며 그 행위 자체를 너무나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그 여유가 참 부러웠다. 저렇게 살라 하면? 나는 충분히 즐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과가 없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만들어진 나인지, 원래부터 그랬던 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행위 자체만으로 즐거운 경험을 떠올려보면, 좋아하는 카페에서 묵직하고 꾸덕한 베이커리 디저트와 진한 라떼를 마시는 일이 생각난다. 그 외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삽질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내가 하는 행위와 내가 보내는 시간이 낭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서 삽질이 아닌 생산성과 연결되는 자원들이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전문서적을 읽고, 프로젝트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그것이 삽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삽질의 기준은 누가 정의할 수 있을까? 얼떨결에 서울시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었고, 두 달간 삼척을 10번 남짓 왔다 갔다 하며 무언가를 만들고,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 활동비는 명목상으로 받을 예정이지만, 활동비의 두세 배의 돈이 이미 더 들어간 듯하다. 누군가가 보기엔 지금이 삽질이다. 커다란 돈을 지원받는 것도 아니고, 성과가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의 나였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바로 ‘삽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내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 지금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 결과가 어떻든, 해보지 않았던 무언가에 도전하고 있는 지금이 참 귀하다. 삽질의 조건? 남들이 보기에 삽질이면 어떠한가. 나에게 있어 그 삽질이 너무나 소중하면 그만인 거지 싶다.
둘째 아들이 학교에서 오자마자 잠이 들어 조용히 글을 쓰고 있다. 효자다. 오늘 저녁은 생전 가본 적 없는 대학원 총동창회에 나가볼 예정이다. 이것 또한 예전의 나 같았다면 삽질 중의 삽질이겠지만, 안 해보던 것을 해봐야 안 보이던 내가 또 보일 테니, 기꺼이 삽질 좀 해봐야지.
내 안의 한 줄
오늘도 나는, 기꺼이 삽질 중이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