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이거지!
서울에 와서 함께 등산을 다니던 친구가 있다. 하지만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어느새 3년이 흘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우리는 어렵게 날짜를 정했다. 금요일 아침 7시 30분, 장소는 7호선 마들역, 목표는 북한산 정상.
아침 6시, 잠에서 깨자마자 세수를 대충 하고 모자를 뒤집어썼다. 전날 밤 준비해 둔 옷을 급히 입었다. 씻기 전에 끓여둔 뜨거운 물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6시 15분, GS 편의점에서 신라면 작은 컵 두 개와 생수 두 병을 샀다. 6시 20분, 7호선 지하철에 올라탔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지만, 두 아저씨 사이에 낑겨서 불편했다. 마침 다음 역에서 맞은편 자리가 비어 얼른 옮겼다.
나는 1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야 했다. 가방에 미리 챙겨둔 책을 꺼냈다. 출근길로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다들 바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졸고 있었다. 고개를 여러 번 떨구는 직장인의 피곤한 표정, 가방을 놓칠세라 꼭 끌어안고 있는 고등학생,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 생각보다 무거운 공기가 지하철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만 오늘 쉬는 날이라는 사실이 괜히 미안해질 정도였다. 솔직히 기분은 너무 좋았다. 생각보다 집중이 잘 돼서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그러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고개를 들었다. 뚝섬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강 위로 떠오른 일출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하철에서 보는 한강의 일출 풍경은 언제 봐도 예술이다. 그렇게 25분이 더 지나고, 마들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 먼저 도착한 친구가 김밥 두 줄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오랜만이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진정한 친구는 자주 보지 못해도 만났을 때 늘 편한 법이다. 친구 차를 타고 북한산으로 향했다.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등산을 시작하기 전 서로를 보면서 다짐했다. “오늘 목표는 정상이다!”
북한산은 처음부터 돌과 바위로만 이루어진 길이었다. 신선했다. 아니, 어려웠다. 처음엔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발했지만 10분도 안 되어 허벅지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가팔라지는 길에 숨이 막혔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졌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부러웠다. 이미 정상을 보고 내려오다니! 우리는 언제 다시 내려오려나. 왕복 2시간은 걸리는 코스인데, 이제 막 15분을 걸었을 뿐이었다.
등산객들과 가볍게 인사하며 에너지를 얻었다. 갑자기 완전 무장한 등산객이 내려오며 경고했다. “위에는 못 올라가실 거예요. 아직 눈이 안 녹았고, 완전 빙판길이에요. 아이젠 없으면 힘들어요.” 아니. 겨우 15분 밖에 안 올라왔는데 더 못 간다고? 괜찮다. 우리는 젊고 튼튼했으니까. 5분 후, 빙판길이 등장했다. 돌 틈에 스며든 눈이 얼어붙어 있었고, 미끄러지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망설이던 순간, 외국인 등산객들이 무리 지어 내려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힙’한 무리였다. 형광색 패딩에 큼지막한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등산이라기보다 아웃도어 화보를 찍으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빙판길을 겁내기는커녕, 마치 눈 위에서 춤을 추듯이 가볍게 내려왔다.
한 명이 우리를 보며 밝게 인사했다. “아녕해쎄호~” 우리는 그저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봤다. 아이젠도 없이 한 손에 카메라를 들었다. 스케이트 타듯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모습이 날다람쥐 같았다. 감탄하며 박수를 치자 그들도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아, 우리도 저렇게 올라갈 수 있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한국에서 외국인들한테 질 수야 없지! 우리는 아기처럼 네 발로 거북이처럼 기어가며 신중하게 움직였다.
정상은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던 친구가 균형을 잃는 모습만 보였다. “야, 조심해…!”라는 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는 썰매라도 탄 듯한 자세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채 그대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
그의 당황한 외침이 산속에 울려 퍼졌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모습이 마치 에버랜드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 같았다. 순간 너무 놀랐지만 친구가 바위에 무사히 멈춰선 걸 확인한 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헐레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야야야, 여기 절대 못 가! 진짜 가면 죽어!”
그 말을 듣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앞으로도 쭉 빙판 코스였고, 한 걸음만 헛디뎌도 그대로 미끄러질 판이었다. 결국 무리하게 오르기를 포기했다. 적당히 넓고 따뜻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우리는 이번 등산의 진정한 목적을 이루기로 했다.
신라면 작은 컵과 김밥을 꺼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수프를 넣었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순간, 온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김밥을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한 참기름 향이 퍼졌고, 라면 뚜껑을 열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몸속에 퍼지는 뜨거운 온기에 온갖 피로가 사라졌다. 젓가락으로 면을 한가득 집어 호로록 삼켰다. 뜨끈한 국물, 쫄깃한 면발, 한 입 베어 무는 김밥의 조화. 그 순간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행복’이었다.
“와, 진짜 너무 맛있다! 너무 행복하다!”
우리는 감탄을 연발하며 라면을 흡입했다. 역시 밖에서 먹는 라면은 어떤 미슐랭 스타보다 맛있었다. 솔직하게 이 맛을 위해 등산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 정상에서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진 못했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배를 채운 후 주변 쓰레기까지 가방에 넣고 하산했다. 올라가는 데 20분, 먹는 시간 30분, 내려오는 데 10분. 왕복 1시간 만에 북한산 등산은 끝났다.
빙판이 녹고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우리는 다시 라면을 먹으러 올 것이다. 그때는 꼭 정상을 찍고, 서울을 내려다보며 한 젓가락 더 크게 떠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