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 18
아돌프 다슬러 (1900 ~ 1978)
아디다스와 푸마는 원래 형제 기업이었지만, 모두 다슬러 가문의 손을 떠나고 말았다. 형제의 앙금으로 갈라섰던 두 스포츠 기업은, 아직 세계 스포츠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화해하시길! 이 땅에서는 이미 화해 끝!
나이키와 더불어 세계 스포츠 시장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은 아디다스다. 나이키보다 훨씬 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아돌프 다슬러는 형 루돌프와 함께 1923년 독일에서 신발공장을 설립했다. 내성적인 아돌프는 제조, 사교성이 좋은 루돌프는 영업을 맡아 사업을 성장시켰다.
1936년 미국의 제시 오웬스가 아디다스의 육상화를 신고,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올랐다. 아디다스는 축구화에 나사고정 스터드를 최초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형과 동생은, 사업적인 지향성과 정치적인 의견차이로 각자의 길을 갔다. 형은 푸마(미주지역에서는 퓨마)를 설립해 독립했고, 동생은 기존사업을 아디다스로 개명해 운영하게 된다. 아디는 아돌프의 애칭이며, 다스는 다슬러에서 따왔다.
아디다스 형제는 신발 재봉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신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워낙 경쟁이 치열했던 신발보다 제빵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형제는 신발사업에 뛰어들었다. 1954년 아디다스는 큰 기회를 가졌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이 헝가리와 붙게 되었다. 아디다스는 당시 독일 팀에게 비가 많이 올 경우에는, 좀 더 긴 스터드로 교체해 시합할 것을 사전에 주문했다. 독일팀이 전반전 2:0으로 지고 있었는데, 후반전에 스터드를 교체해 역전 우승했다. 아디다스 축구화 기술력의 승리였다.
아디다스의 삼선 로고는 다른 업체에서 사용 중이었는데, 다슬러가 16천 유로를 지급해 사버렸다. 또 하나의 엠블럼인 트레포일은 1972년 월계관을 모티브로 제작했고, 삼선 로고와 함께 아디다스의 상징이 되었다.
다슬러가 죽자 아들이 사업영역을 확장하다가, 결국 1987년 프랑스 베르나드 티피 가문에 매각되었다. 푸마도 다른 곳에 인수되며, 2곳 모두 다슬러 가문에서 떨어져 나갔다. 두 형제 집안은 끝내 화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손을 떠났지만, 2009년 아디다스와 푸마를 인수한 가문들이 60년 만에 아디다스의 창업자들이 태어난 독일 바이에른 주 헤르초게나 우자흐에서 화해했다. 아마 하늘나라에서 두 창업자는 화해식을 흐뭇하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내 아들은 아디다스를 좋아한다. 나는 나이키를 좋아한다. 현재는 나이키가 아디다스를 앞선다. ‘Impossible is nothing.’을 주창한 아디다스의 분발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