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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희 Nov 01. 2024

나를 사랑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모험은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사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 로 살아라."-프리드리히 니체-


어린 시절 나는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 잘하는 아이, 버스에서 늘 어른들께 자리를 양보하는 아이,

길거리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어른들의 짐을 들어주던 아이,

엄마에게 좀 더 힘을 보태주고 싶었던 아이, 늘 소외되는 친구들을 챙겨주었던 아이...

착한 아이 증후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은 당연히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 나이에 착하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으나

타인에게 좋은 사람, 베풀 줄 아는 사람, 타인을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람,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 등 대충 그런 아이로 자라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해서 학교를 다니는 내내 친구들에게 먼저 싸움을 거는 일도 없었고

누군가를 시기해보지도 않았다.

엄마에 대한 효심은 어린 나이지만 가득했고 늘 나에게는 선행상, 효행상이 따라다녔다.

그렇게 시골에 한 소녀가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 정말 착한 아이로 살아갔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니 의아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그 착하다는 말이 서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라는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치열한 경쟁과 함께 순수성을 잃어갔다.

선하게 살려고 했던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느새 나는 사람들에게 받는 상처로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다.

힘들어도, 기분이 조금 나쁘더라도,  많은 날들을 그냥 참고 지나쳤다.

그때는 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 못했을까? 

나는 이렇다고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세상과 부딪치며 나는 사람을 대하는 나만의 기준을 세워갔다.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법,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기에

세상은 선함으로 가득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 사람에 대한 경계,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놓아버렸다.

타인에게 친절했으나 선을 그었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해하려 하였으나

선을 넘는 사람에게는 단호해져 갔다. 따스함과 냉정함이 함께 묻어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편안한 사람은 되어 줄 수 있지만, 

누구나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인성이 좋은 사람들, 쇠외된 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직장 내에 나이와 직책과 직급에 상관없이 인간성을 최우선에 두었다.

아무리 나의 상사더라고 공적인 일에는 대우를 해주었으나 

그 외에 인간성조차 찾아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래서 사람에 따라 무시하는 정도가 다른

그런 인간의 부류들이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혐오한다. 

그런 사람들... 역겹기까지 하다. 

직접 당해보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저렇게까지 무시하나?'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며 그 사람 자체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싶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졌다.

그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삶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한 편으로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에 불쌍한 마음조차 들었으나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이 사람 저 사람들과 부딪히며 '나'라는 존재가 더 '나'다움을 만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삶에서 잘 되지 않았던 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내 삶에 아무리 힘든 시간이 찾아와도 

늘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티를 내지 않았다.

개인적인 아픔들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는 일.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픔을 혼자 감당하는 사람이다.

행여나 누군가 알게 되면 "너 괜찮아?"라는 말보다 

"넌 잘 견뎌낼 거야"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는 고통조차 잘 소화해 내는 사람? 그래서 삶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혼자 위로하듯 말한다.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여? 그냥 악착같이 견디는 중인데, 

나는 왜 감정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라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나는 강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아니면 고통이라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아니다. 사실 애써 나의 힘듦을 타인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힘듦의 감정들이 주위사람에게 전염될까 봐.

혼자 이불을 부여잡고 울더라고, 혼자 강소주를 들이켜더라도

그것은 나의 삶이고 내가 견뎌내야 하니까.


자존감이 높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기주의는 아니지만 때로는 이타주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주의 쪽으로 쏠려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믿고 사랑했던 이들의 많은 배신으로 

나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름 사람에 대한 아픔이 많았기에.

사랑하기에 믿어주는 것일 뿐, 

그 어떤 사람도 그 누구에게도 기대를 버렸고, 사람에게 기댄다는 마음조차 버렸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이기에 늘 어떤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모른다.

단지 사람이라는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를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

타인의 시선, 말, 행동등에 휘둘리지 않으며 철저히 나의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늘 생각하며 내 마음의 평온을 찾는 일을 쫒는다.

내 마음이 평온해야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것.

나를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만 행복한 게 아니라 타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아직 남아있는 삶의 시간들을 나를 귀히 여기고 타인을 귀히 여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내가 바라는 희망들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오늘 하루 원하는 삶을 삶을 살지 못했더라도 내일 다시 원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그렇게 다시 나를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한,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어?'

 매일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내가 최고로 사랑해 주는 삶'이라고 답할 것이다.

외부로 오는 모든 것들에 기대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나에게 스스로 행복을 부여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지금 여러분들은 자신을 얼마큼 사랑하며 살고 계신가요?

힘들게 버텨내는 하루하루에 가장 수고스러움을 아는 자신을 사랑해 주고 

토닥여주는 삶이 되시길요.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않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렸다”

-샐리 필드-

“당신이 허락하는 만큼 당신은 놀라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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