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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윤재 Jul 19. 2024

자전거와 안약

두 번째 이야기

  그는 나보다 네 살이 어린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는데,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보령이 녹차로 유명한 곳이 아니냐고 물어서 내 무식을 드러내고는 그건 보성이라고 정정을 당하고 말았다. 선천백내장*이 있어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가 있었지만, 처음에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생활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때 녹내장**이 병발하면서부터였다. 

  언제부터였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돋보기안경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친구들과 자신이 어딘가 다르다고 느낀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아홉 살 때까지는 눈을 가까이 대고서라도 학급 친구들과 똑같은 교과서를 볼 수 있었다. 열한 살 때까지는 표준 교과서의 두 배 크기인 저시력 학생용 확대 교과서를 사용했다. 그런데 열두 살 때부터는 두 배 큰 글씨조차 보기 어려워졌고, 고학년 확대 교과서를 계속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원래 크기의 책으로 돌아온 후 글씨를 크게 키워주는 독서확대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해가 갈수록 책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것으로 보였을까. 그에게는 어렴풋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년의 시간 중 자신을 남들과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일은 특별히 없었다.

  그에게 여전히 보령은 아파트에, 미술학원에, 논두렁에 해 질 녘의 따뜻함이 듬뿍 발라진 곳으로 남아 있다. 첫 기억이 닿는 순간부터 그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다. 따라서 학교가 끝나면 이모 집에 가서 놀다가, 부모님이 퇴근하면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날은 골목을 뛰어놀고 있으면 처음 본 친구가 손을 잡고 다짜고짜 집에 데려가서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지만 그 친구와 잡은 손 사이로 교환되었던 체온이 그의 영혼의 작은 조각으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보령에서 뛰어놀던 그 시절부터 길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혼자 노는 데 도가 텄던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해가 쨍쨍한 오후 자전거를 타는 것이었다. 보령에서 살던 아파트 옆에는 논이 있었고, 그 둘 사이에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편평한 길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전거를 탈 때 한쪽으로는 도회적인 회색의 모래바람이, 다른 쪽으로는 정겨운 초록빛 물결이 귀를 스치던 그 광경을 떠올릴 수 있다.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시골 농촌 같은 모습이었고 한다.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살았어도 좋았겠다고 가끔 생각한다.

  보령은 자전거 타기에는 좋은 곳이었지만 병원에 자주 가기에는 썩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서울에 있는 안과를 방문해 안압을 낮춰주는 약을 받아와 눈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새벽에 갑자기 안압이 오르는 응급상황이었다. 안압이 치솟으면 머리와 눈이 지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안압이 상승한 시간이 길어지면 시신경이 높은 압력에 점점 더 손상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안약을 넣어야 하고, 그래도 호전이 없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

  하루는 새벽에 깨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동네 종합병원을 찾았다. 응급실에서는 엉덩이에 주사를 놓아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진통제 주사는 마법처럼 아픔을 없애주었다. 초등학생 시절 그는 그 종합병원 응급실이 용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이미 통증은 사라졌는데 날이 밝자마자 부모님이 그를 차에 태우고 서울과 보령 사이 140킬로미터를 두 번씩 왕복하는 이유를 당시에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응급실에서 놓아준 진통제는 증상을 완화해주는 치료일 뿐이었으며 진짜 치료는 그 기나긴 대장정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었음을 이해한다.

  첫 번째로 서울에 도착하면 대학병원에서 안압을 재고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휴가를 낼 수 있는 일정을 고려해 수술 날짜를 잡았다. 보통은 대기가 길어 당일에 수술할 수 없었고 이틀즈음 후로 수술이 잡혔다. 수술 대기를 위해 입원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서울에 달리 잘 곳이 없었던 그의 가족은 다시 보령으로 돌아가서 이틀을 기다린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고달픈 여정의 목적은 실명을 막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질환은 비가역적이라서 시력이 좋아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가족의 부단한 노력이었다. 그는 가끔 시골에 살던 바람에 골든타임을 자주 놓쳤던 것이 아쉽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언젠가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을 것을 알아 별로 슬프지는 않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서는 자신의 시력이 공부할 때 걸림돌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똑같은 환경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열세 살 남자아이 치고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아파트와 논두렁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령의 세계가 그가 아는 대부분의 세계였다. 하지만 그는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일 때까지 보령에 살았다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에 비해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미흡할 뿐 아니라, 외출하는 방법 자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보령에는 점자를 알려줄 선생님이 70대 할아버지 한 명밖에 없었다며 그는 쓴웃음을 보였다.

  가족회의에서는 보령에 남는다면 학생 수가 적어 선생님이 더 꼼꼼히 챙겨주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종국에 어머니는 대전이나 서울 같은 큰 도시로,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특수학교를 다녀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상경해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별 계획 없이 무작정’ 서울로 왔다. 

  나날이 시력이 나빠지던 그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묵자의 나라를 떠나 점자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익혀야 했다. 보령은, 굳이 따지자면 아직은 묵자의 나라에 속해 있었다. 나는 여기서 “묵자요?”라는 얼빠진 질문으로 그의 이야기를 끊어야 했다. 대충 점자와 반대되는 글자, 그러니 내가 보는 종이와 모니터에 쓰인 글자이겠거니 했지만 처음 듣는 단어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여과 없이 입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비장애인 분들은 묵자라는 말도 잘 모르시겠네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저도 눈이 보였으면 특별히 그런 말은 쓰지도, 알지도 않았을 것 같거든요.”

  나는 이상하게 부끄러우면서도 그의 말에 위안이 되었다. 뜻을 알고 나니 왠지 묵자의 한자가 黙字(묵묵한 글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묵자’의 올바른 한자는 墨字(먹으로 쓴 글자)로, ‘점자(點字, 점으로 된 글자)’라는 말처럼 글자를 쓰는 방법을 표현한 것일 뿐 그리 심오한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朝鮮)에 대한 수식어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조선의 ‘선(鮮)’은 곱고 뚜렷하고 깨끗하다는 뜻이지, 고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관용구는 그리피스라는, 일본에 거주했던 미국인이 자신의 책에서 만들어낸 말(‘the Land of Morning Calm’)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시적으로까지 느껴지던 아름다운 표현이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그리피스가 당시 일제와 조선을 ‘해가 뜨는 왕국(Sunrise kingdom)’과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대비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더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그가 단 한 번도 조선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 더 기분이 나빴다.

  ‘묵묵한 글자’나 ‘고요한 아침의 나라’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 묘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나는 곧 그리피스와 나는 다르다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리피스는 한 번도 조선에 온 적이 없었지만, 나에게는 시각장애인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A 씨가 있지 않은가. A 씨는 나에게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해주었는데 그 말이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르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 또한 처음부터 시각장애인의 나라에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상경해서 처음으로 특수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그는 시각장애인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시각장애가 급격히 악화하면서 모든 것을 빨리 익혀야 했던 상황도 그의 내적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새로이 체득한 것들 중에는 달가운 것도 썩 내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점자 읽기처럼 그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아직 잔여시력이 조금은 남아 있을 때부터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길을 걷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남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지금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문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연립방정식을 푸는 방법보다는 길을 걷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위험하게 걷는 것을 꼭 배워야 하느냐는 아버지의 만류도 있었지만 못할 것 없다는 자신감이 그를 이끌었다. 그는 처음으로 흰지팡이를 손에 들고 짚으며 걷는 방법을 배웠다.     


*선천백내장: 출생 시부터 수정체에 이상이 있어 사물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는 안과 질환

**녹내장: 안압의 상승으로 인해 시신경이 눌리거나 혈액 공급에 장애가 생겨 시신경의 기능에 이상을 초래하는 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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