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나는 이른 시간에 등교하기를 즐기는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에 큰 에너지 소모를 느끼던 나는 이른 아침의 고요한 등굣길로 그날의 고단함을 미리 보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학업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핑계였으며, 선생님들께는 성실한 학생으로 보이는 이득까지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학생이었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굳이 나누자면 나대는 이들 중 하나였다. 나는 이 '나대는 나'와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에 늘 혼란스러웠다. 고3 무렵에는 졸업을 통해 이 포승줄 같은 일상적 관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 학업 스트레스를 상쇄했다. 졸업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누구와도 사진을 찍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긴 낮잠을 잤다. 그 당시엔 그것이 해방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나는 누군가와 마주치고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쓰는 일이 늘 힘들었다. 미지근한 마음으로 잡은 약속을 누군가 파투 내어주길 바라는 이런 심정을 누가 알아챌까 조용히 침잠하던 시간들은 쌓이고, 쌓여 내 안에 부유했다. 때때로 내가 만든 이 부유물에 부딪혀 다치기도 했다. '나 어딘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은 기어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라는 물음에 이르렀다. 아주 어릴 적의 기억부터 마음에 남는 일들을 짚어 보며 스스로를 더욱 고단하게 만드는 날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떠올려 보면 나는 늘 약간의 손해를 자처하는 쪽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나의 인격이 고매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을 가지는 일에 수반되는 마음을 흐리는 일에 대한 면역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 태도는 의도치 않게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언젠가 좋은 사람으로 비치는 일에 지쳐 진심에서 우러난 태도를 가감 없이 상대에게 드러내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의 태도에 상처받은 상대의 표정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준 상처로 아파하는 상대를 나는 너무도 오래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상대를 상처 입히고 얻게 된 고독은 너무도 달콤했지만 늘 석연치 않았고, 상처와 고독은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처럼 내 곁을 떠돌았다. 상대의 마음에 남게 될 상처를 마주하는 일보다 궁금하지 않은 안부를 의례적으로라도 묻고,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는 사실이 나를 아연하게 했다. 사람과의 관계를 이토록 힘들어하는 주제에 부적절한 방향으로 쓰이는 재화를 보고 눈 감을 배짱도, 나를 대신해 누군가 지게 될 짐을 모른 척할 능청을 가지지 못했으니 삶의 매 순간이 시험 같았다. 스스로 위선의 굴레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작년 여름부터 수영장을 다니며 이 위선을 약간 다른 각도로 해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지리멸렬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던 나의 위선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내 마음 편하고자 행해진 위선을 다정과 배려로 여겨준 사람들이 내가 가진 위선의 굴레를 느슨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날고 긴다는 사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내 능력과 쓰임은 무엇인가에 여태껏 골몰하던 나는 이 무렵 어떤 힌트를 얻은 것 같았다. 그랬다, 나는 위선에 능력이 있었다. 거짓과 가증 그 사이 어디쯤에 '위선'이라는 말을 두고 있을 무렵에는 느낄 수 없는 해방감이었다. 내가 가진 한없이 고독하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는 기쁨이 나를 현실에 발붙이게 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위선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선을 가장하는 것을 악이라 말한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부려 놓지 않고 마음에 걸리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의 머뭇거림을 악이라 말하는 것이다. 티 없는 선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시대 앞에 착함의 탈을 쓰는 것을 어째서 악으로 환용 시키려 하는 것일까. 위선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거짓 위(僞)'자의 한자를 풀어보면 사람인(人) 변에 할 위(爲)가 쓰인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위악(僞惡)'이라는 단어가 악의 거짓을 칭하는 뜻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는 본래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왔다는 것과, 인간이 하는 일이란 당초에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 거짓 위(僞)라는 글자는 어떤 명징한 것에 도달하는 것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가까워지려 마음을 쓰는 인간의 양심과 고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문득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글자의 껍데기만을 가져다 쓰기 좋은 곳에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나는 집 밖을 나설 때면 필요한 소지품을 챙기듯 어설픈 사회성으로 꾸민 가면을 챙긴다. 그 얼룩덜룩한 가면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이 가면을 곱다 말해주는 수영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나의 이 흐릿한 선을 기꺼워해주는 사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