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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숲 Dec 10. 2023

나를 지켜 주는 힘

또 하나의 여름 제주

여행을 가면 희한하게 누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다. 기분 좋은 망상인가? 싶다가도 혼자 가는 여행에서는 어째 그런 기분이 더 든다. 얼마 전에 제주도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오픈전이라 막국수집 앞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분이 “혼자 여행 오셨어요?” 내게 말을 걸었다.


요즘 타인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 보니 잠시 머뭇했지만 순수한 표정으로 건네시는 말들을 듣고는 마음이 금세 풀어졌다.


나는 여행에서 단순한 호기심이나 다정한 호의를 경험했던 적이 많았고 나도 그런 사람이기도 해서 반갑기도 하고 친근하게 대해주심이 감사했다.


알고 보니 막국수집 앞 카페 사장님이셨다. 무계획에 뚜벅이인 나를 위해 묻지도 않았는데 어딜 가면 좋을지 머리를 쥐어짜 내주셨다.


오늘 처음 뵌 분이 즐거운 여행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딜 가면 좋을지 고민해 주시는데 무척이나 따뜻했다. 걷고 싶다고 하니 사람도 없고 혼자 바다를 볼 수 있는 힐링 아지트로 데려다주셨다.


예스, 난 너무 행운아다. 이런 분을 만났으니! 다음에 꼭 놀러 오겠단 말을 남겼다.


행운은 또 왔다.


저녁 8시에 가로등 불은 다 꺼져있고 택시도 안 잡히고 버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분명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 “저녁이 되면 택시도 버스도 잘 안 오니 가시기 전에 미리 확인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얘기해 주셨었는데 공간이 너무 좋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 보니 8시가 됐다.


택시도 안 잡히고 지나가는 차량도 가끔씩 보이고 가로등에 불도 다 꺼졌다.

비까지 많이 오는 최악의 상황. 예전 기억을 살려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나.. 엄지손을 올릴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냐, 난 운이 좋으니깐 지나가는 택시가 분명 있을 거고 날 보시고 분명 태워 주실 거야!’ 밑도 끝도 없어 보일지 몰라도 나의 그동안의 삶의 데이터베이스로 굳게 믿고 기다렸다.


20분쯤 기다렸나? 빈차 표시도 없고 빠르게 쌩 지나가던 택시가 나를 보보 가다가 급히 차를 세웠다.


와! 나이스~~~! 역시 누가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게 분명해!


너무 늦게 도착할까 봐 걱정했는데 태워주셔서 감사하단 말부터 기사님! 행복한 일만 있으실 거예요 라는 말까지 하고 가는 내내 기분 좋은 대화를 이어갔다.


도란도란 제주도 맛집도 추천해 주시고 기사님의 가족관계까지 들으며 즐겁게 숙소에 도착했다. 내 간절함이 통한 것 같아서 아주 기뻤다.


사실 난 운이 평소에 그리 좋은 편은 아닌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안 좋았던 일이 없었다. 긍정적인 생각은 안될 일도 되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의 면접을 보러 갈 때도 아무것도 내밀게 없던 나의 비장의 무기였고 회사를 다니다가 꽃 일을 해보고 싶다며 진로를 바꿀 때도 나를 이끌어준 자산이었다.


시간이 있고 여행을 가고 싶을 때면 신용카드 한 장만 들고 언제든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든든한 긍정의 힘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좋아하는 북카페를 갔다. 어라 막국수 사장님 아니세요???? 어제 먹었던 막국수 사장님을 북카페에서 만났다.


나를 기억하셨는지 인사를 해주셨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며 내적 댄스를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공항까지 넉넉히 2시간이 걸리니깐 이제 그만 일어나야 했다. 어라? 아직 5시인데 택시가 잘 안 잡혔다.


황당했다. 7시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는데 초조한마음으로 될 때까지 잡아보자 했었다. 그때 어?? 막국수 사장님이 나가시는 거다???? 앗! 부탁을 드려볼까? 얼른 뛰쳐나갔다.


상황을 설명드렸더니 흔쾌히 가시는 길인 고산 버스정류장에 내려주신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막국수 사장님을 못 만났더라면 최악의 경우 비행기를 놓쳤을 수도 있었다. (다음날 일정이 없었다면 놓쳐도 오히려 좋아 즐거웠을 테지만 아쉽게도 일정이 있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고산에 있었던 ooo게스트하우스제주살이 스탭일을 했었고 예전부터 사장님의 막국수를 좋아했다며 맛도 여전하고 사장님도 그대로라 너무 좋다고 고백도 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사장님이 꽃을 좋아하시는 것도 알게 됐다.


배우고 싶다고 하셔서 나중에 꼭 기회를 만들어 꽃을 가르쳐 드리기로 했고 내 이름도 물어보셔서 알려드렸다. 감사하게도 늦지 않게 고산 버스정류장에 내려주셔서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얼렁뚱땅 엉뚱하지만 기분 좋은 제주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갈 때는 혼자였지만 돌아올 때는 사람이 남았다.


역시 누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망상의 힘! 따뜻했던 기억으로만 가득했던 또 하나의 여름 제주였다.


1,2. 여전히 맛있는 막국수집
3. 친근하게 대해주셨던 알고보니 막국수집 앞 카페사장님


4. 차로 데려다 주신 걷기좋은 아지트 5. 조수리에 있는 북카페 유람6. 버스도 택시도 오지 않는 쓸쓸한 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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