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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의 가격

돈의 크기보다 마음의 깊이

by 소만

어릴 적 명절이 되면 친척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용돈을 줬다. 세배가 끝나면 아빠가 제일 먼저 용돈을 주셨고, 다음으로 작은 아빠가 용돈을 주셨는데 늘 아빠보다 돈을 더 줬다. 자신이 형제 중에 돈을 제일 많이 줬다고 으스대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도 선했다. 차례가 끝나고 온 가족이 함께 제삿밥을 먹을 때면 항상 자기가 옳고 자기가 더 잘 안다고 큰소리를 쳤다. 형보다 많은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그를 세워 주었고, 그 믿음이 곧 그의 자존심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 내 주변에도 그런 분이 있다. 아이들 생일이면 꼭 축하금을 보내고, 만날 때마다 용돈을 챙겨주는 A다. 나는 A에게 돈을 받을 때마다 고마움보다 부담감이 앞섰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올해 내 생일날에도 용돈을 보내주셨다.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형편이 어려운데, 이렇게 돈을 보내주시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남편이 말했다.

"그게 자존심이야. 돈이 없다고 해 왔던걸 안 챙기면 자존심이 없어지는 거지. 당신도 지금 동정하고 있잖아. 형편이 어려운 걸 몰랐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겠어? 당신은 사람한테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

A의 살림이 빠듯하다는 것을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남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살림이 빠듯한데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부담스러운 돈을 쓴다는 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50원짜리 비닐봉지를 모아 현금으로 바꾸고, 휴게실을 돌며 커피믹스 통에서 쿠폰을 뜯었다. 주말이나 연휴 때 아무도 신청하지 않는 시험 감독이나 선거 보조원을 자청했다. 몇 해가 지나 또래 동료들의 비아냥 섞인 말을 듣고 직장에서 캐쉬백 쿠폰 모으는 것을 그만두긴 했지만, 그 시절 나는 자존심은 없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서도 아이 낳기 전까지 5년을 여름에 에어컨 없이 지냈고, 겨울에 난방을 거의 틀지 않고 살았다.


우리가 악착같이 돈을 모을 때 A는 달랐다. 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인맥도 넓었고 맡고 있는 직책도 많았다. 몇년 전 월급 받는 일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했을 때 요즘 사업은 잘 되냐는 친척의 말에 '계약 한 건이면 대기업 연봉이 나온다'며 자신 있게 웃어넘기고, 시부모님과 온 가족이 여행을 갔을 때도 문의 전화를 받느라 매우 바빠 보였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 산다. 나만 믿어라. 내가 너희 잘살게 해줄게."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2년 전, 남편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는 내가 생각하는 A의 재정 상황이 생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A는 서울에서 공부해야 했던 자녀의 집을 구할 보증금이 부족해 친척집에 살게하는 건 어떨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 월세 주느니 그 돈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는 게 낫지 않느냐." 라고.

남편은 A의 아이가 다닐 학교 근처에 사는 처제네 가족과 같이 지내는 건 어떨까하고 나한테 물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자존심은 무엇일까? 자존심이란 보여주고 싶은, 지키고 싶은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돈으로 지키려는 행동은 결국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 돈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방식이라면 그렇게 지킨 자존심이 '진짜 나'를 지킨 것일까,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를 지킨 것일까?


명절마다 형보다 더 많은 돈을 줬다고 큰소리쳤던 작은 아빠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명절날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나눠주는 세뱃돈은, 사실 아빠가 전날 밤 할머니께 미리 드린 돈이었다. 작은 아빠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더 많은 돈을 줬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작은 아빠가 돈으로 세운 자존심은 사실 할머니께 세뱃돈을 챙겨준 형의 마음의 깊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존심은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아닌 내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그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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