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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May 02. 2024

멜버른에서의 새벽 5시

디자인에 호주를 담다 / 멜버른 여행 Ep 03

멜버른 여행 _  Episode 03


멜버른 여행 Ep 01 https://brunch.co.kr/@maypaperkunah/168

멜버른 여행 Ep 02 https://brunch.co.kr/@maypaperkunah/169



이번 이야기는 멜버른에서의 새벽 이야기이면서 디자인이야기다.


정확히는 3일 동안 새벽 4-5시 내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여행이 아니었더라면, 한국시간 5시에 나는 매일 글 발행을 위해 글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동안은 글을 브런치 글을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멜버른 여행을 즐기고, 새로 들어오는 영감들을 충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멜버른에서의 첫 번째 새벽


멜버른에서의 첫날밤, 

11시 넘어 잠이 들었는데, 

새벽 1시 20분에 눈이 떠졌고,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첫날밤인지, 둘째 날 새벽인지... 구분 짓지는 못하겠지만, 

아이들이 자고 있는 호텔 방에서, 불을 켜지도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5시쯤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 나섰다. 분명 구글에는 나와있었는데, 이리저리 살펴도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곳을 찾아 나섰지만, 이마저도 실패. 갈 곳이 없었다. 


그냥 멜버른 도시를 혼자 걷기로 했다.


사실 나는 새벽에 도시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낮동안 사람들에 의해 가려졌던 건물들이 전체로 보이고, 아무리 시끄러운 도시였어도, 새벽에는 나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정도로 도시는 조용하다. 


이것은 20살 때 프랑스 여행에서 우연히 접했던 기분 좋은 경험 때문에 생긴 습관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다 빠져나간 도시 그대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자주, 여행을 가면 새벽에 호텔방을 빠져나와 도시를 배회하곤 했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그랬다.


Right / THE SUPREME COURT OF VICTORIA



온통 조명이 켜 있음에도

지구종말이라도 온 듯 

사람하나 없고 


한없이 조용함에도 

평소 듣지 못했던 소리는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저 한 블록 안에서의 

짧은 산책이었음에도

어느 영화 세트장을 온 듯 

온통 시대가 섞여있어

자연스레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나 홀로 걷기를 하면서, 멜버른 시티의 특이한 점을 두 가지 발견했다. 


보행자를 위한 신호등에서 딱딱 딱딱... 끊임없는 소리가 난다. 이는 분명 어젯밤에 듣지 못한 소리였는데, 새벽에는 온 시티가 울릴 정도로 딱딱 딱딱 거렸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긴장도 했지만, 몇 분을 걷다 보니 바로 익숙해졌다. 이제 나에게는 '멜버른'하면 생각나는 소리가 되었다. 


두 번째는 건물이다. 

일단, 대부분의 건물에 조명이 켜져 있다. 사무실로 사용하는 1층도 훤하게 불이 켜져 있어서 내부의 인테리어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시드니에서는 오래된 해리티지 건물의 외벽은 리모델링 못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부 디자인만 변경하거나, 오랜 해리티지 건물 위로 모던한 빌딩을 증축한 건물들이 꽤 있다. 멜버른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하지만, 시드니보다 좀 더 현대적이고 모던하고, 젊은 감각이 있다고 해야 하나? 나의 느낌은 그랬다. 


200년 전의 빅토리아 시대 건물에 모던한 디자인의 건축 혹은 인테리어가 믹스가 되면서, 동시에 그 대비가 극을 이루면서 건물 하나하나가 꽤 독특하고 동시에 역사가 꽤 깊어 보였다. 




이렇게 나 혼자 

멜버른 시티 건물을 즐기며

여러 번의 디자인 영감을 받으며, 

이 도시의 에너지도 받으며, 

마지막으로 새벽의 에너지도 받으며, 

한 시간을 홀로 걸은 듯하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는데, 

역시 걸으면 생각의 깊이도 달라지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면 

나의 사고도 새롭게 변하는 게 느껴진다.  


이제 돌아가서 일하자!


한 시간 정도 거리를 배회하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아직 아이들이 자고 있을 시간이라 방으로 바로 올라가지는 않고, 좀 더 나만의 새벽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멜버른의 커피가 유명하다해서 마시고 싶었는데, 결국은 못 마시고 돌아왔다. 대신, 편의점에 들러, 시드니에서도 항상 마시던 커피우유를 사 왔다. 호텔 안에서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전날밤, 다니엘과 이야기 나누던 곳이 생각났다. 호텔의 한편에 마련된 소파공간이다. 가만히 앉아 보다 보니, 호텔의 벽의 이미지가 멜버른의 그라피티 컬처를 표현했다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 호텔의 포인트 디자인 콘셉트가 그라피티인 듯하다. 


사실, 난 그라피티와 깊은 인연이 있다. 대학원 시절, 호주 문화에 대한 리서치를 하고, 디자인 작업을 할 때, 멜버른의 그라피티를 선택했었다. 그 당시, 코비드 시절이라 온라인으로만 접했던 그라피티다. 사실, 실제의 그라피티를 보기 위해 멜버른에 온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냥 그라피티가 그려진 벽화를 접하는 것이 아닌, 그라피티가 디자인으로 적용된 공간에서 앉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실제 그 그라피티 문화 속에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그 당시, 멜버른으로 참 오고 싶어 했는데, 진짜, 원하면 이루어지네.  







멜버른에서의 2번째 새벽



오늘도 새벽 5시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3시 10분경. 멜버른에서의 기상시간은 들쑥날쑥 나도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잠들기 전, 딸아이에게서 수영장이 24시간 운영한다는 정보를 들었기에, 이 날은 눈 뜨자마자 수영장으로 노트북을 들고 출근(?)했다. 


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작업하다가, 아예 선베드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보이는 그라피티 애플. "Peace" 그라피티 제품이 이렇게 모던한 디자인과 어울릴지 몰랐다. 




멜버른에서의 3번째 새벽




정확히 4시 01분에 기상, 이날도 바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전날 만난 청소하는 이가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내가 그의 자유로운 작업시간을 불편한 청소시간으로 만든 건 아닌가 미안하긴 했지만, 난 꿋꿋하게 앉아 노트북 작업을 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이틀 동안 수영장에서만 새벽을 맞이했으니, 색다른 멜버른의 새벽을 보고 싶어서 테라스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떠 있는 열기구들이 있다!!! 나도 타고 싶다!!


그때는 몰랐는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멜버른에서 하지 못하고 온 일중에 가장 후회되는 일이 열기구를 못 타고 온 것이다. 언젠가가 될 다음 멜버른 여행에서는 꼭!!! 열기구에서 일출을 맞이해보고 싶다. 3년 안에 꼭 해보리라!





멜버른에서 맞이한 세 번의 새벽시간. 

매일매일 새로운 새벽을 만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작하지 않은 하루를 내가 가장 먼저 맞이하는 기분은 짜릿했고, 나에게 이것저것을 전해주고자 하는 멜버른의 새벽의 에너지는 강렬했다. 여전히 그 기운을 느낀다. 






떠나라. 매일 떠나라. 더 멀리 더 넓게 떠나 사냥하고 낚시를 즐겨라. 
불안을 버리고 맑은 시냇가와 따뜻한 난롯가에서 편히 쉬어라. 
젊은 시절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걱정근심으로 깨어난 새벽으로부터 자유로운 모험을 떠나라. 
낮이 되면 날마다 다른 호숫가를 찾고
밤이 오면 어디에 있든 집처럼 편안하거라. 
네가 있는 그곳보다 더 넓은 들판은 없으며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치로운 놀이도 없다. 
소로(주, Thoreau)





(주)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믿음사, 2021




다음편 >> https://brunch.co.kr/@maypaperkunah/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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