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새벽 5시, 나는 집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 가족들을 깨우고 싶지 않아 발뒤꿈치를 최대한 들고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조차 나의 숨소리가 새벽의 고요 속에서 나에게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듯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메아리는 나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새들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함을 넘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도 하루종일 조용한 동네이지만, 일요일 새벽의 적막은 바람 소리조차도 나를 세상과 분리시킨 듯했다. 마치 모든 존재가 자신을 감추고 사라진 것 같은 순간 속에서,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숨을 죽여야 할 듯했다.
그런 고요 속에서 10분쯤 걸어 기차역에 다다를 즈음, 저 멀리 언덕 아래로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거대한 기차조차 새벽의 고요에 흡수되어 버린 듯, 나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무성영화처럼 흑백의 화면 속에서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2-3분 차로 기차를 놓친 나는 플랫폼에 앉아 1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나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는 긴장한 마음에서 나오는 숨이 아니고 10분간의 걸음 속에서 빨라진 심장 박동이 만들어낸 리듬이었다. 그 리듬은 마치 내 존재가 시간 속에 새겨놓은 증거처럼, 내 몸 안에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의 그 리듬에 같이 박자를 맞추는 바람의 소리는 5-6층 높이의 마른 잎을 흔들어대어 가끔은 파도소리를, 가끔은 빗소리를, 가끔은 자잘한 자갈밭의 소리를 내어주었다. 자동차가 멀리서 내는 바퀴의 마찰 소리도, 바람을 가르며 내는 속도의 소리도, 모두 나의 리듬에 맞춰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각각의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복잡함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소리 안에 내 존재의 소리도 자연스레 포함시키고 있었다.
바람에 굴러가는 마른 나뭇잎조차도 플랫폼의 아스팔트를 긁으며 우주 안에서 자신도 작은 파동임을 알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작은 파동은 내가 고요 속에서 몰입한 나 자신과 교차하며, 내 생각과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요함 속에서 나는 결국 내가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그 속에서 호흡하며 사유하는 하나의 작은 생명체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며 나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기계의 소음과 더불어 내가 이 순간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하나의 진동으로 나에게 다가와 나의 발바닥을 둥둥둥둥 건드리고 있었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기차 안의 밝게 켜진 조명은 그동안 흑백이었던 세상에 색채를 입힌 듯,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는 하나의 빛처럼 느껴졌다.
집을 나서고 기차에 오르기까지 20여 분, 나는 그 사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요 속에서 나 자신에게 몰입하는 법을 배웠고, 세상의 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익혔다. 그 소리들이 내 안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다시 나만의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나는 한층 더 깊은 사유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이제는 내가 창조하는 나만의 세계에서,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 나만의 틀 안에서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고요 속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되며,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 소로 ”
(주)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2023, 믿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