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울고 싶으면 울어라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닭살이 돋고 놀라게 된다. 예전에 혼자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떼를 썼을 때가 있는데, 나의 발음과 강세를 확인하기 위해 내 목소리로 영어 말하기를 녹음하면서 직접 듣기 시작했다. 그 순간, 괜스레 혼자 민망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냥 웃어버렸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음성인데 그 소리의 정체는 ‘나’였던 것이다.
말하면서 직접 들리는 나의 목소리와 녹음해서 제삼자의 관점에서 듣는 나의 목소리는 완전 다른 세계였고, 친구들이 나의 목소리 색깔에 대해 차분한 느낌이 전달된다고 이야기해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스로가 나를 인식할 때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활동적이면서 내성적인 성격을 같이 지닌 걸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서 나를 살펴볼 때는 또 다른 분위기가 전달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히 중학교 전까지는 활발하다가 중학교 때는 완전 사춘기의 끝판왕이었다. 말도 없고 수줍음도 많아지면서 내성적인 자아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 시간은 얌전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편했는지 조용한 침묵이 오히려 더 편했다. 혼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책 읽고 편지 쓰며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는 종종 친구들과 만나면 친구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침착한 내 모습에 나도 의아해할 때도 있다. 분명히 쾌활하고 가만히 있지 않던 나일 텐데 ‘사춘기’라는 시절을 지나면서 변해버린 나의 성격에도 신비로움이 가득했고, 그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언젠가 또 변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느꼈던 기분과 잠들기 전 밤에 느껴지는 기분이 늘 동등하지 않은 것처럼 내 마음도 스스로 가누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여자라서 눈물이 많은 건지 감정이 풍부해서 그런 건지, 친구의 슬픈 사연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의 서글픈 모습 또는 무엇인가 감정을 건드릴만 한 사건을 접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고 있다. 여자는 공감하는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를 비롯하여 풍부한 감성을 소유하고 그 공감을 통하여 같이 이해하고 받아주면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버금갈 때도 있다. 100% 모든 것을 공감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70% 이상 해석한 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남동생과 다툼으로 서로의 상황이 안 좋아져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엄마와 함께 나눈 대화 덕분에 화가 났던 부분도 수그러들고 남동생에게 화해하자고 먼저 다가서게 될 때도 있었다. 남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중요치 않음을 그 상황으로 인해 배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만약 그 뒤로 그와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하여도 그전보다는 덜 할 것이고 좀 더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마음이 장착되게 된다.
울고 싶으면 울어라!
예전엔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들로 내 마음이 아프고 멍들어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으로 소화해 내느냐는 내가 할 몫이었다. 그렇게 수긍한 뒤 나타나는 현상은 혼자 있을 때도 과감하게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소리가 나든, 눈물이나 콧물이 흐르든지 말든지 지금 나와의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 해소하고 싶은 용기가 발동하기 시작했고, 무엇이 그렇게 나를 눈물짓게 만드는지 조용히 고민을 착수해 봤다.
행복만 가득하다면 그 행복에 대한 거대한 값어치는 진정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슬픔과 눈물이라는 반대 현상도 공존하니 그 행복에 관하여 더 용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넓어질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려운 곤경에 처하거나 자신도 모를 불행에 도달한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의 소식을 들으면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라고 말이다. 애수에 젖어 눈물이 맺힐 정도라는 것은 그만큼 잘 견뎌오고 참아왔던 시간이 길었다는 이유고, 눈물을 내비친다는 것은 울고 싶으니 눈물을 흘려달라는 마음속의 애환일지도 모르니. 눈물이 흐르는 그때는 힘들고 좌절할 것 같지만 울고 나면 마음은 더 가볍고 홀가분해진다. 옛말에 ‘눈물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약을 마시는 것처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눈물*’이 있기에 오늘도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눈물;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 자극이나 감동을 하면 더 많이 나온다.
자신의 주관으로도 너무 많이 울고 있다 싶으면 더 성숙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눈물이 흐를 때마다 부끄럽고 서글프다면 그렇게 많이 울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잠깐의 현상일 수 있다. 어린 나이 때 눈물이 많은 이유도 아직 여러 가지 고난을 넉넉히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새롭게 느끼는 그 슬픈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로 호소해야 할 것 같은 순수함이 가득했다. 그리곤 엄마 아빠 품에 안기어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은 다시 웃음소리를 내면서 기분 좋게 뛰어다닌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만약 자신이 보기에도 심각할 정도로 매일 매시간 눈물로 가득하다면 그건 마음 앓이가 오래되어서 눈물이 아닌 웃음을 찾아 나서는 연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20대 말쯤, 매일 눈물로 호소하며 하루하루를 견뎌왔지만 혼자 지내는 시간을 중심으로 밖으로 나가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는 습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집이었기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햇빛을 받으며 기분이 좋아져야 할 상황이 필요함을 넌지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 정말 5분을 기점으로 동네 길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고 10분, 20분, 또는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등등 점점 외부의 상황에 일부러 부딪히면서 혼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는 내 마음속에서 찾은 것들은 쓸데없는 고민이나 먼 과거의 돌이킬 수 없는 추억, 또는 이유 없이 담아 놓은 의미 없는 잡념들이 가득했었다. 무엇부터 버려야 할지를 겨눠볼 수 없었고 그냥 무시하고 또 등한시했기 때문에 생성된 내가 직접 만들어 놓은 무거운 병고였다. 외부로 인한 고통도 하나의 상처가 되지만 자신의 내부로 인해 만들어진 화도 만만치 않은 쓰라림을 남길 수 있다. 그러니 한 번 더 진중하고 과감하게 지금 자신의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난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하나씩 되뇌어 보면서, 이젠 더 생각 안 해도 되는 것들은 용감하게 떨쳐버리고 지금 필요 없는 고민도 단호하게 버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찻잔에 담긴 물이 아무런 이변 없이 오랫동안 그대로 있다면 언젠가 썩어서 냄새가 나거나 오물로 변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씩 살펴보면서 버리고 싶을 때 버리고 다시 새로운 물을 부어서 담아둔다면 그 찻잔 속 물은 버리고 난 뒤 생긴 공간에 새로운 물로 채워져 더 깨끗하게 정화되면서 순환하게 된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비유하자면 인생의 그릇 또한 일정하지 않게 커졌다가 작아질 수 있는 그물망과 같다. 왜냐하면 그 순간의 상황에 따라 걱정하는 크기와 빈도수도 달라질 테고, 고민하는 주제와 방법도 달라져 있을 수 있으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져 있거나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 바로 이 ‘인생’이라는 큰 그릇과 비슷하여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어떠한 가치를 품고서 나아가느냐에 따라 흘러가는 방향도 그 안의 빛깔도 달라질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심 어린 본질과 조금씩 변하더라도 시작할 때의 초심, 그리고 자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자기애를 놓치지 않고 잘 간직해 나간다면, 아마도 인생의 그릇 속에는 웅대한 무지갯빛 나무들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무성하게 자라나 자신에게 힐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내가 직접 고민하고 선택해서 심어놓은 나무들이기에 하나씩 무엇인가 뜻깊은 의미를 담고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