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면 돼
엄마와 나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쿵하면 짝, 척하면 착 하는 콤비이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껌딱지이긴 했지만,
사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같이 발맞추어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성인이 되어서였다.
엄마와 각별하긴 했지만 영락없이 애교 부족한 장녀였던 나는
어느 날 엄마가 툭 내뱉은 서운함 섞인 말 한마디에
머리를 맞은 듯 대앵-하였다.
표현이 부족했던 나는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가 다 안다고 생각하였고
엄마가 느끼는 서운함, 외로움, 커가는 자식을 보며 느낄 쓸쓸함, 이런 감정들에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애교도 많이 부리고 그러면서 엄마와 더 가까워지고, 이야기도 많이 하며 누구보다 서로의 속마음을 제일 잘 아는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그런 일련의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감정을 알아차리고 필요한 것들을 먼저 챙길 수 있는 이 순간, 이 시간들이 문득문득 너무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여느 날과 같이 엄마와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물어보았다.
‘엄마는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응. 당연하지.’
엄마는 엄마여서 알고 있었던 것일까?
엄마에게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냥 기다렸지. 네가 엄마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언젠가는 엄마를 이해하리라 믿고 기다린 거지.’
결국은 기다림이 답이었다고 한다.
묵묵히 기다리다 보면 역시나 엄마 생각처럼 소망처럼 그렇게 되어있더란다.
부모는 자식을 한없이 기다려주는 존재라고 한다.
엄마가 깨달은 사랑은 기다림이었다.
자식들 본인의 속도를 존중하며 기다리고,
자신들이 가려는 길이 혹여나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조급함을 드러내지 않고,
엄마의 감정을 티 내지 않는 것,
엄마가 우리를 키우며 꼭 지키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기다리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
멀찌감치서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제대로 된 길로 갈 수 있도록 길라잡이를 하는 것이다.
나는 자주 엄마한테 또 물어본다.
‘어떻게 기다렸어? 답답하잖아.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고 기다려?’
그러면 엄마는 대답한다.
‘엄마 자식이잖아. 엄마가 누구보다 제일 잘 알지.
그리고 만약 엄마 생각대로 안 돼도 뭐 어떡해? 결국 그 길을 직접 걸어보고 경험해 봐야 너희가 깨달을 텐데.
그런 과정도 다 기다리는 거야.‘
전에는 수없이 얘기를 들어도 이런 기다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가진 고민들과 걱정들이 시간이 지나며 해결되고, 기다리면 자연히 지나가는 것들을 보며 깨닫는다.
기다리는 것만큼 힘든 것도, 쉬운 것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조금 보이기 시작한 엄마의 기다림을 느끼며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 본다.
아마도 엄마의 기다림 끝에는 나의 행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