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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눈이 되어줄게

엄마의 약속

by 스와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미리야... 이제 진원이 수술 들어가. 수술 잘 받으라고 이야기해 줘...‘


이게 남동생의 첫 번째 눈 수술이었다.


우리 집은 막내 동생 빼고는 모두

‘아벨리노 각막 이영양증’이라는 유전 질환을 갖고 있다.

‘아벨리노 각막 이영양증’은 눈에 단백질로 된 하얀 물질들이 각막에 생기며 시야를 방해하고 심한 경우에는 실명까지 될 수 있는 병이다.

다행히도 다른 식구들은 남동생에 비해 발병 속도가 더디고 시야를 크게 방해하지 않는 부분에 하얀 물질들이 껴서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다.

하지만 남동생은 제일 심한 케이스에 걸려 발병 속도도 빠르고 시야도 뿌옇게 다 덮어버려 적어도 2년에 한 번씩은 꼭 각막을 깎아내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남동생의 유전병을 알게 된 것은 생후 몇 개월 후였다. 갓난아기일 때에도 눈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보였으니 그 당시 ‘아벨리노‘의 존재조차 몰랐던 우리 가족이 충격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병을 치료하고 연구하는 선생님은 연세 세브란스 병원 안과 병동에 계신 교수님 한 분뿐이었다.

동생으로 인해 가족들의 유전병을 알게 되었고

5살이 되던 해 남동생은 첫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이도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수술을 하게 된 동생,

그리고 본인도 ‘아벨리노’를 갖고 있으면서도 죄인이 되어버린 엄마.

수술을 하던 날 침대에 누워 겁에 질린 남동생이 울면서 말하였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왜 이렇게 낳았어. 수술받기 싫어.’

이 말에 엄마는 속절없이 평생의 죄인이 되어버렸다.


회복하면서, 그리고 다시 검사를 받으러 병원을 다니면서, 엄마는 마음에 커다란 짐을 진 채 혼자 끙끙 앓아왔다.

실어증이 올 정도로 마음앓이를 하고,

아픈 자식을 보며 남몰래 울고,

철없는 투정에 또 마음으로 울며 말이다.


그런데 평생을 슬퍼만 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

엄마는 눈물을 지우고 마음을 고쳐먹고

‘내가 평생 너의 눈이 되어줄게.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보자.’

이렇게 다짐을 하고 슬픔뿐이던 마음을 조금씩 돌리기 시작하였다.


일 년에 몇 번씩 잡혀있는 검진 일정과

조금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수술 직후 몇 개월,

그리고 또다시 반복되는 흐릿함과

다음 수술을 기약하는 검진 결과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며 8번 정도의 크고 간단한 수술들을 했다.

그때마다 동생은 아파했고 원망했고 체념했고

그러며 엄마도 함께 아파했고 미안해했다.

하지만 점점 달라진 점은 엄마가 동생에게 미안함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이렇게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상황과 서포트를 해 줄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함을 느끼고, 남들의 아픔도 공감하고 생각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매번 수술방에 들어간 동생을 기다리며,

회복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조금 나아졌다고 다시 까불거리는 동생을 보며,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깎여나가는 엄마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하였다.

‘엄마, 진원이가 하는 말 전부를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

엄마는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고, 이제는 진원이의 인생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해야 진원이도 철없는 얘기를 덜 할 거야.

엄마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각자가 가진 아픔과 고통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같은 크기와 깊이로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힘든 상황을 매번 같은 깊이로 공감하고 같이 힘들어해 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론 큰일이지만 말이라도 별거 아니다, 할 수 있다, 금방 회복될 거다 라며 농담 섞인 말도 건네고 대수롭지 않게 일상적인 말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술 때마다 늘 전쟁이긴 하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든 것은 여전하다.

이때 쓴 글처럼 몸이 아프고 힘들면 서로의 마음이 왜곡되기도 한다.


https://brunch.co.kr/@soir5310/115



그리고 동생의 원망 섞인 말은 엄마에게 여전히 큰 상처고 트라우마다.

그래서인지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한없이 작아진다.

아픈 자식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아픈 손가락인지 알지만

엄마가 마음 아픈 것은 싫은 첫째 딸로서...

다시 한번 엄마의 마음을 도닥여본다.

엄마 마음 아파하지 마...

엄마 잘못이 아니야...

진원이 잘 견뎌내고 잘 이겨낼 거야...


엄마가 한 약속처럼,

엄마는 반드시 평생 남동생의 눈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옆에서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땅을 짚는 지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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