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아버지와 첫 해외여행
"더 늙기 전에 니 고모가 사는 곳에 한 번 가보고 싶구나."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칠순 기념 여행지로 밴쿠버를 정하게 되었다. 고모는 아이들이 어릴 때 밴쿠버로 이민을 가서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몇 번 방문했지만 유독 아버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하셨다. 기운이 있을 때 고모가 사는 곳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웠지만,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무산되었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잠잠해지자, 아버지께서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올해는 00네 갈 수 있겠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밴쿠버 여행 준비를 서둘렀고 고모에게도 연락을 드렸다. 그런데, 웬걸 비행기표 예약을 끝내자마자 아버지의 허리 디스크가 터진 것이다. 눕지도 못하겠다고 앓는 소리를 매일 내뱉으시던 아버지는 때문에 여행을 취소하네 마네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다행히도 수술을 받고 순조롭게 회복되어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전에 세운 계획에는 남동생 가족도 함께하는 일정이었으나, 그 사이 남동생이 해외로 발령이 나면서 결국 여행 멤버는 다섯 명으로 정해졌다. 남동생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솔직히 나는 괜찮았다. 원래 인원이 많을수록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의 고충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 여행의 모든 잡다한 준비와 계획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했기에, 차라리 단출한 편이 마음이 편했다. 사실 부모님과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해외여행이라니 이미 단출하지 않기는 하다.
게다가,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원래 온 관절이 환자인 나의 허리와 아킬레스건이 슬슬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으니, 멤버가 적을수록 내게는 오히려 더 나은 상황이었다.
각종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캐나다행 비행기에 모두 몸을 실었다. 발을 뻗을 수 있는 앞쪽 좌석에는 여행 직전 가장 몸 상태가 안 좋았던 내가 앉게 되었고, 나머지 식구들은 일렬로 나에게서 좀 떨어진 좌석에 앉았다. 캐나다 도착 전 마지막 자유를 만끽했다.
오랜만에 먹는 기내식. 나는 소고기를, 2호는 미리 주문한 알러지 프리 식단을, 1호는 네모남자를 따라 비빔밥을 먹었다. 기내식을 기대했던 1호는 맛이 없다며 투덜거리기에 나는 조용히 말해줬다. '기내식은 소고기야.'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나서, 비행 내내 잠도 안 자고 영화를 보았다. 역시 에너지가 다르다. 나는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스트레칭으로 간신히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그렇게 긴 비행이 드디어 끝나고, 우리는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찾은 밴쿠버 공항에는 입국 정보를 방문자가 직접 입력하는 키오스크가 새로 생겨 있었다. 입국자의 정보를 입력하면 작은 종이가 나오고, 이걸 들고 가서 입국 심사를 받는다. 이후 짐을 찾고, 입국장을 나가기 전에도 그 종이를 다시 보여주어야 했다. 키오스크 덕분에 편해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복잡한 절차를 거쳐 밴쿠버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 다섯은 무사히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밴쿠버 여행이 시작되었다.